통유리로 된 중앙 현관을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합니다. 사원증을 찍고 게이트를 통과해 25층을 누릅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1분 서 있었는데 열댓 명이 모였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대화는 없고 모두 스마트폰을 봅니다. 7층과 13층, 15층을 걸쳐 25층에 도착했습니다.
저와 사무실 맞은편 회사 남직원이 내렸습니다. 박 대리라고 했을 겁니다. 전에 단체로 회식했는데 붙임성이 좋고 외모도 준수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박 대리와 눈이 마주쳐 인사를 하고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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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보니 오전 8시 30분입니다. 오전 회의 준비를 하면 시간이 얼추 맞을 겁니다. 어차피 준비라고 해도 오타를 보고 PPT를 인원수만큼 인쇄하는 정도입니다. 쉼표가 2개 이상 찍힌 문장이 2군데, 마침표가 없는 곳이 1군데 있었습니다. 문자가 왔습니다.
[선배님, 죄송해요. 거의 다 왔어요.]
10분이 지나고 나연이가 맨얼굴로 출근했습니다. 가서 단장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아침에 못 일어나는 것만 빼면 괜찮은 후배입니다.
나연이가 돌아왔습니다. 이 회사는 사람을 얼굴 보고 뽑는 걸까요? 나연이는 시집 잘 갈 겁니다. 저 같았으면 그 얼굴로 회사나 다니진 않을 겁니다. 게다가 나연이는 실수도 별로 없고 마감도 잘 지킵니다. ‘여자는 얼굴값 한다’는 말은 미묘합니다.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나연이가 윙크를 보냅니다. 눈치챘나 봅니다. 잔소리하려는데 나연이가 미안하다며 팔짱을 낍니다. 능구렁이 같은 년. 귀여우니까 봐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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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쯤 되면 일은 대부분 끝납니다. 가장 애매한 때입니다. 서로 할 일 없는 걸 알지만 눈치를 봅니다. 부장님은 “진급할 생각 있으면 도망가지 마”라며 “회사는 회사에서 죽을 사람을 원하니까”라고 하셨습니다.
회사에서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전 아직 젊습니다. 부장님에겐 회의한다고 둘러대고 나연이에게 눈치를 줬습니다. 나연이도 이제 익숙합니다.
“선배, 어디 가요?”
갈 곳을 정하진 않았습니다. 아마 집에 갈 겁니다. 하지만 약속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순 없습니다.
“서점. 요즘 책을 하도 안 읽는 것 같아서.”
나연이는 같이 가자고 했지만 혼자 가겠다고 했습니다. 회사 5분 거리에 있는 대형 서점으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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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은 시즌마다 바뀌는 가판대 풍경을 보는 맛이 있습니다. 중앙 가판대를 보니 ‘집중력’이 유행인가 봅니다. ‘몰입’ ‘ADHD’ ‘도파민’ ‘SNS 중독’ ‘쇼츠의 미래’ ‘미니멀라이프’ 다 비슷한 얘기입니다. 모든 게 과하고 산만해 미쳐가고 있다는 얘기 말입니다.
저도 한 때 미니멀라이프에 도전했습니다. 옷을 줄이고, 가구를 줄이고, 음식도 줄이고, 나중에는 인간관계까지도 줄이라고 했습니다. 인간관계를 줄이는 건 쉬웠습니다. 문제는 음식이었습니다. 정확히는 먹으면 안 되는 음식입니다. 정제 탄수화물과 설탕, 가공식품입니다. 술은 당연히 안 됩니다.
사실 그걸 빼면 먹을 게 없습니다. 직장인이 술과 가공식품을 안 먹는 건 불가능합니다. 회식 때 술을 안 마셔도 퇴근 후 맥주 한 캔을 포기하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퇴근길마다 마주치는 닭강정 집을 지나치는 것도 고역입니다.
중앙 가판대 옆 문구 코너는 변화가 적지만 매번 눈이 갑니다. 요즘엔 펜도 비싸지만 1~2만 원 정도는 괜찮습니다. 양껏 사치 부릴 수 있는 영역입니다.
만년필도 문구 코너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만년필 마니아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을 접했는데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만년필 잉크는 이름부터 ‘월야(月夜)’ ‘죽림(竹林)’ ‘단풍(丹楓)’입니다. 어떤 색인지 상상이 가십니까? 푸른 염료로 코팅한 금속 바디나 레진으로 알록달록하게 꾸민 바디도 만년필이 매력적인 이유입니다.
예쁜 만큼 비싼 가격은 만년필의 가장 큰 흠입니다. 저렴한 것도 만원부터고 괜찮다 싶은 건 10만 원을 가볍게 넘어갑니다. 감성값치곤 만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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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을 2바퀴 돌고 나왔습니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50분입니다. 슬슬 지하철에 퇴근 인파가 몰릴 겁니다. 지하보다는 땅 위로 가는 게 마음이 편합니다. 261번 버스는 순환 노선이라 길 건너에서 타면 다시 집에 갈 수 있습니다.
정류장에는 자줏빛 구루마와 할머니, 헤드폰을 쓴 남학생이 있습니다. 퇴근할 때마다 보는 회사 건물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큽니다. 오후 6시가 조금 넘어 버스가 왔습니다. 카드를 찍고 앉을 자리를 둘러보는 데 그가 있습니다.
저 남자를 버스에서 본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가 왜 버스에 타고 있을까요? 저를 따라왔을 리는 없습니다. 퇴근 시간에 맞춰 버스에 타고 있던 것도 아닐 겁니다. 아니어야 합니다.
자의식이 과했습니다. 괜한 생각 말고 귀에 무선 이어폰을 꽂았습니다. 날이 흐리니 태연의 <들리나요>가 좋겠습니다. 태연도 20대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도 태연도 지금은 서른 중반이 됐습니다. 아마 둘 다 혼자 살 겁니다. 그나마 태연은 벌어둔 돈이라도 많으니, 누가 채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감고 가사에 귀를 기울입니다.
노래를 2번쯤 들었을까요. 누가 제 팔을 건드렸습니다. 그 남자입니다.
“이제 내리셔야 해요.”
눈을 끔뻑끔뻑하기를 3번, 창밖을 보니 우리 동네입니다. 버스 문이 열립니다. 일어나 자리를 확인하고 바로 내렸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탓인지 목덜미가 뻐근하고 머리가 아픕니다. 집에 가려는데 그가 말을 건넵니다.
“저기요.”
“왜요?!” 조금 신경질적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셔츠 옷깃을 가리켰습니다. 그의 옷깃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그, 저 말고.”
제 옷깃을 봤습니다. 셔츠 위로 긴 침 자국이 있었습니다. 그는 멋쩍게 웃고 떠났습니다. 남겨진 전 자켓을 여미고 집으로 달렸습니다. 집으로 가면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