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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장훈 Dec 22. 2023

2억짜리 장지갑

장인어른께 100억 상속받기 4화

오래전 KBS 개그콘서트에서 '......'이라는 코너를 본 적이 있다. 침묵과 어색함을 소재로 한 코너로 개그맨 유민상 등이 열연했다. 이 코너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여자친구 집에 인사드리러 간 남자가 여자친구의 아버지와 단 둘이 남게 되는 상황이다.




여자친구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 여자친구의 어머니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 방학 기간 여자친구는 병원에서 어머니를 간병했다. 당시 나는 광주광역시에 소재한 학교에서 근무했다. 어머니의 병문안을 위해 서울에 위치한 병원으로 갔다. 약속한 방문 시간은 토요일 오후. 미리 서울에서 자취하는 친구에게 연락해 그날 밤 잠자리를 부탁해 두었다.


병원에서 아버님, 어머니께 인사드린 후 여자친구와 바깥공기를 쐬러 나갔다. 우리가 데이트하는 동안 아버님께서 어머니 곁을 지키셨다.


병원으로 돌아와 인사드리고 친구네 집으로 향하려 하는데, 여자친구의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오늘밤 어디서 자나?"


"저, 친구네 가서 자려고요."


"그냥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가서 자자."


아버님께서는 청유문의 형식을 빌렸지만 명령문의 어조로 말씀하셨고


나는 '그냥 친구네 가서 잘게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까요?'라고 대답해 버렸다.


서둘러 여자친구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지만 여자친구도 여자친구 어머니도 날 구원해주지 못했다. 체념하고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야, 나 오늘 여자친구네 집에 가서 자야 할 거 같아. 여자친구 아버지랑 둘이"


바로 답장이 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친구는 전혀 서운해하지 않고 아버님과 두 손 꼬옥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다 편히 자라고 배려해 주었다.


역시 찐친이다.


내가 그날 밤 동행해야 하는 사람이 여자친구 아버지가 아니라 여자친구였다면 당시 솔로였던 친구는 쌍욕을 날렸을 거다.


"오빠, 미안해.."


"아냐, 난 괜찮아. 괜찮고 말고. 괜찮겠지..?"


아버님 차를 타고 여자친구가 없는 여자친구네 집으로 향했다. 우려와 달리 차 안의 분위기는 침묵과 어색함으로 가득 차지 않았다.


아버님은 말씀을 잘하시는 분이셨고 나는 씩씩하게 '네네', '그렇죠', '맞습니다'만 반복하면 충분했다.


주차 후 집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번득 코트에 지갑이 없다는 끔찍한 사실을 자각했다. 허둥지둥 뭔가를 찾는 나를 보며 아버님은 뭘 놓고 왔냐고 물으셨고 나는 지갑이 없어졌음을 실토했다.


우리는 다시 내려가 지갑을 찾았다. 지갑은 다행히도 차 근처에 떨어져 있었다. 당시 내가 쓰던 지갑은 클립형으로 아주 심플했다. 워낙 거추장스러운 걸 싫어하고 현금보다는 카드를 주로 썼기에 작은 걸 선호했다.


지갑을 찾은 건 다행이나 여자친구 아버지께 이런 모습을 보여드린 게 너무나도 창피했다. 집에 가서 잠자리 들 준비를 마치고 편히 주무시라고 인사드리려 하는데 안방에 계신 아버님께서 부르셨다.


"훈이야, 이리 와봐."


장롱 안에서 무언가를 찾고 계셨다.


"아, 여기 있네. 내가 쓰던 지갑이야. 앞으론 이 장지갑을 써."


꽤 낡았지만 쓸만했다.


그리곤 내 평생 받아본 질문 중 가장 대답하기 어려웠던 질문을 하셨다.



너는 돈을 리스펙(respect) 하니?



'돈을 리스펙 하냐고?'


'돈이 리스펙해야 하는 대상인가?'


신앙심이 독실한 어머니 덕분에 나는 태어나서부터 교회에 다녔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돈과 관련한 성경절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돈을 리스펙 한다고 대답하면 나의 신앙을 부정하고 돈을 사랑한다고, 돈을 섬기노라고 고백하는 것 같았다.


적잖이 당황한 나를 보며 아버님은 말씀을 이어가셨다.


"돈 많다고 행복한 거 아니라는 말. 많이들 하지. 나는 그 말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해."


'정말 많이 듣는 말이다. 돈 많다고 행복한 거 아니라는 말.'


"돈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아주아주 고마운 존재야."


'하지만 돈이 행복을 보장해 주는 건 아니지 않나?'


"나는 돈을 정말 사랑해."


선언처럼 들렸다. 솔직한 걸까. 노골적인 걸까. 진실된 걸까.


"학교에서 어떤 학생들이 훈이를 따르지?" (나는 중고등학교 교사다.)


'갑자기?'


"훈이가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는 학생들일 거야."


'끄덕'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고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을 따르게 돼 있어."


'끄덕끄덕'


"나를 함부로 대하고 평가절하하는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야."


'끄덕 끄덕끄덕'


"돈을 리스펙 한다는 건 돈을 좇아간다는 의미가 아니야."


'으잉?'


"돈의 가치를 인정하고 돈을 대하는 태도가 진실되며 돈이 귀한 줄 아는 걸 의미하는 거지."


'아....!'


"내 말을 명심해. 돈을 리스펙 해야 한다."


'돈을 리스펙 해야 한다....'


"군대에서 제식훈련했었지? 제식훈련을 왜 할까?"


'제식훈련...???'


"실전에서 제식훈련 때처럼 동작을 맞춰서 움직이나? 절대 그렇지 않지. 그럼 다 죽어."


'끄덕끄덕'


"제식훈련은 정신교육인 거야. 군인들에게 복종, 질서의 정신을 무의식까지 침투시키는 거지."


'오호, 끄덕끄덕'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장지갑을 써. 돈을 구기거나 접어서는 안 되는 거야. 이런 행동이 모여 돈을 존중하는 정신이 무의식에 새겨지지."






그날 밤, 나는 오래도록 뒤척였다. 돈 많다고 행복한 거 아니라는 말. 나의 아버지, 어머니께 정말 많이 듣는 말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두 분은 돈이 생기면 참 좋아하신다.


돈이 없어서 사업을 포기해야만 할 때, 아버지는 행복하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 더 작은 집으로 이사해야만 할 때, 어머니는 행복하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걸 포기해야만 할 때, 우리 삼 남매는 행복하지 않았다.


돈이 많았다면 아버지, 어머니는 부부금슬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돈이 많았다면 우리 삼 남매는 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나의 아버지는,

나의 어머니는,

나는, 돈 앞에 진실되지 못했던 거 아닐까?




그날 받은 장지갑을 지금도 쓰고 있다. 아버님께서 물려주신 거라 더욱 애틋하다. 나에게 더 많은 부를 안겨줄 부적처럼 느껴진다. 작은 지갑을 쓸 때는 종종 지갑을 흘리곤 했는데, 장지갑을 쓴 이후에는 한 번도 흘리지 않았다. 희한하다.


지금 나에게 돈을 리스펙 하냐고 묻는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대답할 것이다.


완전 리스펙 합니다.





다음날 새벽 아버님께서 일어나셨는지 거실에서 기척이 들린다. 지갑이나 흘리는 얼빠진 모습을 만회해야 한다. 마치 매일 새벽에 기상하는 사람처럼 거실로 나가 인사드린다. 그리곤 바로 돈 강의 2부가 시작된다.


나의 무의식을 송두리째 뒤흔들려고 작정하신 게 분명하다.






ps. 그나저나 제 장지갑이 2억짜리인 이유는... 다다다다음번쯤? 소상히 말씀드릴 겁니다. 죄송합니다. 댓글로 요오옥을 날리셔도 마땅히 받아들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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