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장훈 Feb 09. 2024

100억 벌겠다고 선언했다.

장인어른께 100억 상속받기 10화

2008년 봄이었던가. 강원도에서 군 복무 중이었다. 하루하루 별 의미 없는 삽질만 오가던 때. 내무반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TV에서 내 눈을 사로잡는 영상 하나가 흘러나왔다. 김동률의 '출발' 뮤직비디오. 중국 어느 소수 민족 사람들, 과거를 박제해 놓은 듯한 고(古) 성,  너른 들판과 높이 솟은 설산. 저기다. 저길 가야겠어.


"나 전역하면 저기 갈 거야."


나 말고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그 뮤직비디오에 내무반에 있던 까까머리들의 시선이 고정된다.


"에이, 배상병 님~ 전역하셔도 아마 뮤직비디오만 보고 계실 것 같은데요?"




"오빠."


여자친구의 말이 묵직하다. 이젠 감이 온다. 아버지께서 무언가 지시하셨구나.


"응, 뭔데?"


"아빠가 오빠한테..."


"편하게 얘기해."


"아빠가 오빠의 인생계획서를 보고 싶으시대."


"인생, 뭐?"


"인생계획서."


"인생계획서가 뭐지?"


"앞으로 인생을 어떤 방향으로 살아갈 건지 뭐 그런 내용? 미안해 오빠."


"하하. 어쨌든 알겠어. 써보지 뭐."


여자친구와 교제한 지 2년이 좀 안 됐을 때였다. 부자아빠는 나의 인생계획서가 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때는 부자아빠께 본격적으로 인생 수업을 듣기 전이었다. 당시 나는 주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현재 근무하고 있는 재단의 신규교사 채용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서관에 앉아 각 잡고 인생계획서를 쓴다. 어떤 말들로 채워야 할지 고민한다.


후보 1

to 선이의 아버님께.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 인생입니다.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삽니다.

from 훈이 올림.


음.. 이건 너무 경건한가?


 후보 2.

to 선이의 아버님께.

교사가 된 후 선이랑 결혼해서 자녀 둘 낳고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한 번 믿어보시죠.

from 훈이 올림.


이건 너무 앞서나간다.


후보 1, 2 중에서 고민하다 후보 1을 택한다. 다소 진중한 분위기로. 문구점에 가서 가장 고민을 덜하고 만든 듯한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사 온다. 펜을 들고 조심스럽게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to 선이의 아버님께.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간입니다.
그저 저에게 오늘 하루가 주어졌음에 감사하며
오늘의 분량으로 주어진 노동과 사랑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겠습니다.

from 훈이 올림.


내가 써 놓고 뿌듯해했다. 이 얼마나 멋진 철학인가. 여자친구 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답장은 없었다. 아마 그 편지를 보고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선이랑 결혼시키려면 교육을 좀 많이 해야겠는데?'


교사가 된 이후, 부자아빠와 자주 만나면서 인생 수업을 들었다. 돈, 부자에 대한 생각의 폭이 넓고 깊어졌으며 부자가 되고 싶은 갈망도 생겼다. 하지만 그 갈망을 어떻게 채워가야 할지에 대한 치열한 계획도 고민도 없었다.


어느 날 부자아빠께서 여쭈셨다.


"그래서, 훈이는 부자가 되고 싶니?"


"네!"


"어느 정도 자산가가 되고 싶은데?"


"100억대요."


"이야."


'... 너무 높게 불렀나?'


"100억 자산은 어떻게 만들건대?"


"......"


"꿈이 큰 건 좋아. 그런데 구체적인 실현 방안이 있어야지."


"......"


"그렇지 않으면 목소리만 큰 초등학생이 '나는 대통령이 될 거예요.'라고 말하는 거랑 뭐가 달라?"


"그러네요..."


"오래전 이야기야. 거래처에서 10년짜리 달력을 선물하더라고. 벽면에 붙일 수 있는."


"네.."


"거기에 내 목표를 적었지"


"오"


"OO 년도까지 부동산 등기 O개 만들기, 금융자산 얼마 이상 보유, OO 년도에 아내에게 OO차 선물하기. 이런 식으로 말이야."


"그리고 잠재의식에도 목표가 각인되도록 그걸 크게 적어서 여기저기 붙여놨어."


"목표를 실현하려면 돈을 벌어야 하잖아. 'OO 년에 몇 건 계약' 이런 식으로 또 세부 목표를 적는 거야."


"목표를 이루려면? 구체적인 세부계획을 짰지. 한 달에 거래처 몇 번 방문, 사업가 정기 모임 참석 이런 식으로."


"내가 꿈꿨던 모든 것을 이룬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씩 이뤄가는 걸 보면서 짜릿함을 느꼈지."


"훈이는 이제 막 독립하는 시기인 만큼 자산에 대한 계획뿐만 아니라 커리어에 대한 계획, 가족에 대한 계획, 노후에 대한 계획도 있어야지."


"인생계획서를 다시 써봐."


"넵."


부자아빠의 조언을 참고하여 고민을 시작했다. '저는 이런 목표가 있고 이렇게 이뤄가겠습니다.'라고 하기에는 내가 그리는 미래가 아직은 불명확했다. 몇 달 후 그냥 솔직하게 고민되는 점들을 적어서 부자아빠게 보여드렸다. 인생계획서가 아니라 인생고민서였다.


부자아빠는 본인의 딸과 나를 데리고 북악산스카이웨이로 드라이브 갔다. 팔각정에서 저 멀리 평창동의 고급 주택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결국 인생계획은 본질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할 거 같아."


"매일매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봐."


나는 누구인가

내가 좋아하는 건 무엇인가

내가 잘하는 건 무엇인가

난 무얼 하고 싶은가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그날 이후, 한 동안 여자친구와 나의 데이트는 멜로에서 다큐멘터리로 장르가  바뀌었다. 우리는 자아를 탐색했고 보지 못했던 세상을 찾아다녔다. 막연하게 소망하던 것들을 뚜렷하게 만져보기 위해서는 얼마가 필요한지 계산했다. 자녀는 몇 명을 나아야 우리 가족이 완성될지 토론했고, 인간의 무력감 앞에선 무얼 의지하며 버텨내야 할지 함께 고민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 인생 설계도를 그려나갔다.


8개월 후 3번째 인생계획서를 제출했다. 수많은 각주와 도표로 정말 고민 많이 했음을 생색냈다. 부자아빠는 진지하게 검토하셨다. 더 이상 새로운 인생계획서를 요구하지 않으셨다.


 


 

군대 전역 후 나는 배낭을 싼다. 목표지에 대한 정보는 중국 윈난 성의 '리장'이라는 도시 이름뿐. 가이드북도 중국어 구사 능력도 없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칭다오. 칭다오에서 버스 타고 지난. 지난에서 기차 타고 충칭. 충칭에서 기차 타고 쿤밍. 쿤밍에서 기차 타고 대리. 대리에서 히치하이킹으로 리장. 지대 높은 위치에 자리 잡은 찻집을 찾아간다.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김동률의 출발. 한눈에 들어오는 고성을 바라보며 엽서를 쓴다. 후임들에게. 나 지금 여기 진짜 왔어.     


중국 윈난 성의 리장 고성 @ pixabay



꿈꾸던 세상, 상상하던 미래가 지금 여기 내 발 위에 있게 되는 경험. 우리의 인생이 선사하는 짜릿함 아닐까? 100억대의 자산가가 되겠다고 했던 나의 선언은 언젠가 사실이 될까? 나의 인생계획서는 회고록으로 다시 쓰여질까?


그러려면 부지런히 벌어야 한다. 이제 돈 버는 이야기를 해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