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먹고, 자고, 사고, 천천히 걸으며 경험하는 한국적 라이프스타일
충남 부여는 1,400여년 전 백제 왕도의 문화를 아름답게 꽃 피운 백제 예술의 고장입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제일의 문화 수준을 자랑했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백제민들의 세련된 역사와 문화가 담긴 아름다운 문화유산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저는 부여의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전통미술공예를 공부하면서 부여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어요.
그런데 어쩌다 부여까지 가게 되었냐구요? 어렸을 적부터 박물관과 미술관에 노는 것을 너무 좋아했어요. 종일 있어도 심심하지 않았고 똑같은 것을 계속 봐도 좋았습니다. 자연스럽게 미술을 전공하기를 희망했고 한 번도 이 길 말고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부여에 한국전통문화학교가 개교한다는 포스터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원하던 바로 그런 학교였어요.
전통에 대한 막연한 애정이 학교에 가서 더욱 깊어졌지요. 전국의 아름다운 유적지를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다닐 수 있었고, 문화재청 산하의 학교인지라 일반인들은 관람할 수 없는 것들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양동마을 한옥마당에서 올려다보던 한옥이, 미왕사의 단풍이, 석굴암의 웅장함과 섬세함이, 아직도 가슴에 장면으로 남아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석가탑과 다보탑을 처음 봤을 때, 너무 감동스럽고 벅차서 눈물이 났습니다. 박물관에서 청자의 빛깔을 보면서 황홀해했고, 불상이나 그림을 하염없이 하루종일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한 번도 변함없이 전통미술공예에 대한 이 애정은 사라지지 않고 더 깊어져만 갑니다.
이 아름다운 전통미술공예가 사라지지 않으려면, 수요가 늘어나야 하고 시장이 넓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이십대 초반 어린 나이에 창업을 하게 된 계기입니다. 제가 너무 사랑하는 공예를 더 알라고 싶었고 살아남게 하고 싶었습니다. 일상을 행복하게 하는 공예, 그 멋진 일에 제가 보탬이 되고 싶었어요. 유학을 가려고 대학교를 다니는 내내 아르바이트 해서 모아 놓은 자금 천 만원으로 쌈지길의 3평 매장을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지금 '세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온길의 시작이기도 해요.
23살부터 아트샵을 운영했던지라, 부동산을 보러 다니는 게 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학부 때부터 부동산 책을 읽으며 공부했고 네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지도책을 펼쳐놓고 땅을 보러 다녔습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투기를 하기 위해서도 아니라, 매장을 하려면 부동산을 보는 안목과 상권에 대한 분석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27살 때 첫 부동산을 샀고, 그 누구에게도 금전적인 도움을 받지 않았기에 당연히 계약도 혼자 가서 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집을 사고 팔고 여러 번을 했고, 헤이리에 신축도 해 보고, 성북동의 낡은 주택을 사서 고쳐도 보고, 매장 인테리어 공사도 끊임없이 하면서 - 세상과 부딪치며 공부해왔습니다. 수업료를 꽤 비싸게 낸 셈이에요.
치앙마이나 교토를 좋아하시나요? 장인과 크래프트샵이 모여 있는 지역, 문화와 예술로 물든 마을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곳이 있나? 떠올려보면 딱히 없었습니다. 그게 늘 아쉬웠어요.
한국적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단일한 공간이 아닌, 작가에게 오랜 시간을 허용할 수 있는 길과 마을을 상상했습니다. 16년 간 일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공예품을 제안해 온 세간의 오랜 꿈이기도 했습니다. 작가, 장인과 손님을 잇는 길을 구상했습니다.
저는 부여를 무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도 불릴만큼, 부여는 엄청난 문화유산들을 보유한 아름다운 지역이었지만 이렇다 할 콘텐츠가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그 흔한 책방조차 없었으니까요. 부동산부터 공사, 공간 운영, 제작, 유통… 저의 모든 경험을 자온길 프로젝트에 그대로 녹여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자온길과 만나게 된 사연에 대해서
들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