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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Oct 15. 2019

프롤로그

우리 영화관 이야기

영화는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평점이 높은 영화를 골라서 봤는데, 나는 별로였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반면에 별로 알려지지 않는 영화의 어떤 한 장면이 잊혀지지 않아, 계속 머릿속에서 맴도는 경험을 한 적도 있을 것이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입을 모아도 내게 별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면 헛것이다. 영화 감상이라는 집단적이면서도 동시에 개인적인 경험이다. 두 개의 영역이 충돌하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한다. 그런 교집합을 엿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이 글은 그 교집합이 있는 어떤 영역을 더듬기 위해 쓰기 시작했다. 주로 개인적인 영역에 방점을 두고 있는데 개인적인 것이 결국은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에 동감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영화는 나의 일이 되었다. 마감일에 쫓겨서 제대로 영화를 즐기기도 못했기 때문에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그냥 일상이 되어버렸다. 번역 일을 그만 뒀을 때, 나는 제대로 이제는 영화를 즐기고 싶어졌다.  우연찮게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받았다. 처음에는 2주에 한번씩,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매주 상영하는 영화관이 됐다.  한 두해가 지나자, 이제 영화 상영이 일상화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어느 덧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는 이곳을 '아무도 모르는 우리 영화관'이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아는 사람만 아는 영화관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화관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관객의 숫자도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50명을 넘기는 힘들다.  동네 관객이 멀리 사는 친구에게 입소문을 내면서 먼 곳에서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이 사는 동네에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장소는 얼마든지 있을 터이지만 굳이 이곳을 찾아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들은 이 영화관이 특별하다고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나름대로 성실하게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만 삶에는 늘 채우지 못한 공간이 생겨난다. 봄이 되고 햇살이 맑아지면 자신의 인생에도 평화가 찾아올까 잠시 설레지만 햇살은 금세 사라지고 풍경은 똑같아진다. 즐거운 변화는 살짝 나타날 것 같다가 자취를 감춘다. 방금 지나갔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는 사이에 거짓말처럼 빈 공간이 된다. 영화관은 평범한 우리 동네 사람들의 빈 공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나는 흥행에 성공해서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들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 혹은 잘 만들어졌는데도 상영관에서 너무 빨리 막을 내린 다양성 영화들을 선택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에는 영화에 대한 설명과 함께 서로의 감상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에 부담을 많이 느낀다. 심지어 영화에 대한 소감이나 의견을 나누는 것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그런데 어떤 영화의 경우에는 의외의 상황이 벌어진다. 이야기를 서로 하고 싶어 한다. 영화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자신의 얘기로 끝난다. 흔히 열 명이 영화를 보면 열 명의 감상이 다 다르다고 한다. 그들은 한 영화를 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열 명 각자의 영화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위안받기를 원한다. 또한 일상으로부터 탈피를 경험한다. 그 날은 동네 주민이라기보다는 영화 관객으로 만나는 날이다. 그런 만남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계기를 의미한다. 영화 감상이란 너무나 익숙해서 내 살과 분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친밀한 내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실행하는 것과도 같다. 때로는 위안받기를 원하며 영화관에 들어서지만 뒤통수를 맞기도 한다. 가끔은 거북스럽고 수용하기 힘든 영화들도 있기 때문이다.     


  운영자인 내가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결정하면서 갈등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공감 쪽이냐, 낯설게 하기 쪽이냐. 당연한 일일지 모르지만 공감 영역에 있을 때 반응이 훨씬 좋다. 낯섦이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마음이 약해져 한쪽으로만 치우쳐서는 곤란하다. 따뜻한 환상은 오래 가지 않는다. 위안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된다. 행복할 때는 내가 왜 행복한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보는 목적 중 하나는 ‘낯설게 만들기’라고 생각한다. 익숙한 것은 사고를 촉발 키지 않는다. 머리에서 사고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이게 무슨 상황이지?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지?”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다. 그러면서 내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환경, 사고방식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네 편 중 한 편은 공감을 비껴 나는 영화를 선택한다. 이른바 거리두기를 목적으로 하는 영화다. 몰입도가 떨어지고 서사도 다층적이라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런 영화를 본 뒤에는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더 관심을 갖는다. 감독은 왜 저런 식으로 결론을 맺었을까. 아니면 왜 결론을 내리지 않고 끝났을까. 주인공 캐릭터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캐릭터들 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관심사는 여러 방향으로 향한다. 한 영화를 보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많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다. 영화 관람이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일이다.  감상을 보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짐작되는 경우도 많다.  


  영화를 보면서 위안을 받았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이며, 보기가 힘들었다면 그 감정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우리는 그 근원을 더듬을 필요가 있다.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의 상처 입은 과거를 파악하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이 소박한 영화관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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