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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비늘 Oct 23. 2021

1.5개 국어

출근 전 카페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미국 유학을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혼자 점심을 사러 나갔을 때의 일이다. 익숙해 보이는 Subway 간판을 보고 들어가 샌드위치를 시키려 하는데, 점원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듣기 평가보다 2배는 빠르고 다른 억양으로 말하니, "Bread" 외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여러 번 되묻고 나서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알아듣는 척하며 "Yes"를 되풀이했다. 직원이 갸우뚱하는 사이에 샌드위치는 점점 커져만 갔고, 1 Foot의 뚱뚱한 샌드위치는 의도치 않게 나의 저녁도 해결해줬다. 아마 그 직원은 작은 체구의 동양인이 예상외로 엄청난 대식가인 줄 알았을 것이다.


글로 공부하는 영어와 화로 배우는 영어는 너무 달랐다. 머릿속에서 맞춘 문법은 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고, 계획했던 말과 내뱉은 말은 같지 않았다. 어렵게 입을 뗐다가도 단어 순서가 뒤섞여서 문장 끝맺음이 명확지 못해 뒤죽박죽이 된 적도 많다. "F" "V"처럼 한국어에 없는 발음은 연습을 해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엑센트조금 엇나가못 알아듣는 미국 사람들 앞에서 나는 말 끝을 흐리곤 했다. 무엇보다도 어려웠던 것은 영어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비해 한국어로 생각하고 번역해야 하는 나는 한 박자 느렸다는 것이다.

의도치 않게 Subway의 모든 메뉴는 다 먹어본 것 같다. 출처: TimeOut

불필요한 이 과정을 없애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국어에서 영어로, 다시 영어에서 한국어로, 그 작업을 계속하다 보면 10분의 짧은 대화도 나를 지치게 했다. 힘이 들어간 대화는 그 어떤 주제라 할지라도 상대에게 부담을 더하고 뉘앙스의 조율이 되지 않는다. 흘러가는 방향을 억지로 바꾸려고 할수록 대화할 기회를 기피하게 되고, 결국은 익숙하고 편한 상대를 찾아 그 작은 범주 안에서 생활하게 된다. 물고기는 너비 속도에 맞게 자라온 몸과 지느러미 모양이 르다. 언어도 마찬가지로 그 환경에 맞게 유연하게 변해야 다.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0개 국어라는 농담이 있는데, 이는 애매한 영어실력과 녹슨 한국어가 합쳐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을 한다. 머리가 커버린 지금, 굳어진 치관유지하면서 언어를 배우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의 지 않으면서, 따라 하며 연습한 남의 문장들을 구사하고자 는 것은 모순되게 껴졌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틀을 내려놓는 연습을 한 것 같다.

노을 지는 수평선 위에 자유의 여신상이 걸쳐있다.

갓난아기가 부모님을 어설프게 따라 하며 배워가듯이, 나는 다시 시작했다. 소리 내어 말하는 것 외에도 몸짓과 표정 또한 배워야 했다. 대의 나이와 무관하게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해야 했고, 표현을 할 때에는 단조로운 어조를 피하려고 노력했다. 떤 교과서에서도 찾을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내가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것이었다. 남이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으로 시작해 나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으로 승화시키는 경험이기도 했다.


다른 언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어휘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을 넘어 그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있다. 물을 달라는 단순한 부탁을 넘어, 상대의 표정을 읽고 공감하는 신체적 언어와 농담을 주고받는 공감대에 속해야 비로소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채워져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것과 비우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차이가 있다. 어린아이에 비해 내가 훨씬 더 어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한 때 이민자들이 입국심사를 받던 Ellis 섬에서 바라본 Manhattan의 모습이다. 낯선 땅의 낯선 언어를 들었을 때, 두렵고도 설렜을 것이다.

고대와 중세 유럽인들의 대부분은 Gibraltar 해협 너머의 세상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 경계를 넘으면 가라앉은 Atlantis가 있다고 믿었고, Dante의 Inferno에서도 인간이 넘어가서는 안될 영역으로 나온다. 지중해와 대서양을 나누는 이 선은 Hercules의 기둥이라고도 불리는데, 팽창했던 근대 유럽 이전 해협 안쪽에 안주했던 당시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나 또한 기둥 앞에 멈춰 서 있다. 학교를 벗어나 직장을 통해 새로운 이들을 만나면서 아직도 어색한 언어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두려울 때도 많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순수한 호기심처럼 가볍게 한걸음 더 내디뎌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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