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근 Apr 17. 2016

< 봉알 할아버지 >

- 지금은 볼 수 없는 그리운 삶의 모습 -

+ 신체 부위에 대한 표현은 어릴 적 사용하던 그대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조금 민망한 표현이 있더라도 양해 바랍니다. +


국민학교 3학년 즈음, 우리 가족은 전남의 한 시골 읍내로 이사를 갔다.

  

주인집을 포함한 지금으로 따지자면 독립형 다가구 주택(?)이었던 그 집엔 네 가구가 한 마당을 두고 살았다.     

정문을 바로 보던 우리 집을 기점으로 왼편엔 정식(가명)이네 집이, 오른쪽엔 주인집과 철수(가명)네 집이 한 변이 긴 ‘ㄷ’자 형으로 배치된 그런 집에서 우리는 한 대문을 이고 살았다.     


곧 군 입대를 앞둔 아들과 여고생 딸을 둔 주인집을 제외하고 나머지 집의 아이들은 나와 나이가 엇비슷했다.


내 여동생과 나이가 같아 나와 두 살 터울이 났던 정식이는 그 아래 남동생이 하나 있었고, 나와 동갑이었던 철수는 그 아래로 남동생이 둘이나 더 있었다.


전부 남자아이들 판이었고 나이도 엇비슷하다 보니 우리들은 함께 놀며 금방 친해졌다.

  

장정 둘이 나란히 걷기도 힘든 그 좁은 골목길에서 야구를 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맞은편 집 마당에 열린 감을 쪼아 먹는 참새를 새총으로 잡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던 그때......     


우리에겐 호랑이나 마마 귀신보다 더 무서운 동네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타지에서 이사를 왔던 나에게 그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려준 건 유치원에 다니고 있던 철수네 막내 동생이었다.     


학교를 일찍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날, 길에서 철수네 막내 동생을 만났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같이 집으로 돌아가던 그때, 골목 입구에서 그 녀석이 주춤하며 말했다.

“형, 만화방 열렸으니까 돌아서 가자”

“응? 그냥 가면 안돼?”

“어... 봉알 할아버지 나와!”     

여려서인지 막내 녀석은 평소 발음이 좋지 않았다.

입안에서 소리를 웅얼거리듯 말하는 경향이 있어서 처음엔 무슨 할아버지라 하는 줄 몰랐었다.

그냥 ‘성격 괴팍한 할아버지가 계시는가 보다’하고 막내 녀석의 손에 이끌려 집을 한참이나 돌아가며 물었다.

“아까 무슨 할아버지라 그랬어?”

“어... 봉알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 봉알 아프게 따먹어!”

그렇게 말하며 막내 녀석은 그 당시 당했던 아픔을 느끼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막내가 말한 봉알 할아버지는 우리들의 집 바로 옆에서 만화방을 하시던 할아버지였다.

각목에 양철판을 아무렇게나 덧댄 문을 단 그 만화방은 간판 하나 없이 할아버지 혼자서 운영되고 있었다.

가끔 볕 좋은 날이면 런닝 차림으로 자투리 나무 조각을 붙여 만든 엉성한 벤치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시던 만화방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가 바로 봉알 할아버지였다.

    

사내아이들이 보였다 하면 괴롭히시던 할아버지는 나에게는 한동안은 해코지를 하지 않으셨다.

아마 이사 온지 얼마 안돼 이 동네 아이가 아니라 생각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옆집에 이사 온 아이란 걸 할아버지가 인지하게 됐을 즈음의 어느 날, 만화방을 지나 대문을 열려고 할 때 사건은 터졌다.     


덤불 속에서 사냥감을 기다리던 살쾡이처럼 갑자기 튀어나온 만화방 할아버지가 내 앞을 막아섰다.

깜짝 놀라 주춤하는 나에게 할아버지는 “이 놈~~~ 고추 따먹자~~~” 하시며 음흉한 웃음을 띄우셨다.

그리고선 뼈마디가 불거져 나온 그 큼지막한 손을 내 사타구니 깊숙이 들이밀었다.     


그 당시 어른 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고추 따먹기’는 흔한 일이었다.

다만 고추 근처에 손을 갖다 대는 척 만하고 “후루룩”하는 고추 먹는 소리만 요란하게 냈을 뿐 직접적인 신체 접촉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만화방 할아버지는 달랐다.

아주 뿌리부터 뽑을 작정인 것 같았다.     


너무나 아팠다.

하지만 아픈 티는 내기 싫었다.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우악스런 손으로 뽑을 듯 잡아당기고 있는 할아버지를 나는 똑바로 쳐다보며 아픔을 참았었다.

그게 장난스런 애정이 담긴 다른 어른들의 고추 따먹기와는 다른 파워 때문이었던지 아니면 낯선 할아버지의 신체 접촉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그때 ‘나는 아무렇지 않다’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려 애썼다.     


“험...험...”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이내 손을 내 몸에서 떼시며 헛기침을 두어 번 하시고는 그냥 돌아가셨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이 사실을 알렸다

“엄마! 엄마! 옆 집 만화방 할아버지가 내 고추 따먹었어!”

그러나 어머니는 웃으시며,

“응, 옆집 할아버지가 우리 아들이 예뻐서 그랬는가 보다...”하고는 별 일 아닌 듯 여기셨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아니야! 엄청 아프게 따먹었다니까!”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우리 아들이 엄청 예뻐 보여서 그런 거야”라고 답하실 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셨다.     


그때는 그랬다.

부모님과 손을 잡고 가다가도 모르는 어른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다가와 “아이가 겁나 이쁘요”하면서 고추를 따먹으셨고, 부모님들은 아들 가진 부모의 특권처럼 그 모습들을 즐기시곤 했다.

당하는 아이 입장에야 모르겠으나 아이를 만지는 뭇 어른들의 손길과 눈길은 사랑이었고 나름의 애정표현이었으며 또 그것을 보는 부모님들도 아이에 대한 관심과 애정쯤으로 받아들이셨었다.

그러니 나의 고자질은 어머니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답답할 노릇이었다.     


할아버지 앞에서는 강단 있는 척했지만, 할아버지와 마주칠 당장 내일부터가 걱정이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도망 다니고 피해 다녀야 하나 하고 걱정에 걱정이 더해가기만 했다.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다르게 그 날 이후 만화방 할아버지는 나에게는 절대 손을 대지 않으셨다.

그래서 다른 집 아이들이 기겁을 하며 악을 쓰고 도망을 다니고, 집을 한참이나 돌아서 다닐 때도 나는 태연히 할아버지 앞을 지나다닐 수 있었다.     


동네 사내아이들 중에서 오로지 나만이 만화방과 할아버지 앞을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프리패스권’을 가진 아이였다.     


돌이켜 보면 할아버지는 아이들이 도망 다니는 모습을 귀여워하셨던, 약간의 가학성을 즐기시던 분이지 않았나 싶다.

다른 아이들이 무서워 모두 할아버지를 피할 때, 고추를 따먹겠다고 달려들어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노려봤던 나에겐 무심할 정도로 관대하셨으니 말이다.

또 새로 이사 온 아이에게 친, 자신의 장난을 아이가 정색을 하고 거부했으니 미안한 마음과 쑥스러운 마음에서도 그러셨던 것 같다.     


그렇게 3년여의 시간을 살았던 그 동네에서 아이들은 봉알 할아버지를 피하고 도망 다니며 한 해 한 해를 보냈다.     


“으~~~앜~~~ 봉알 할아버지다~~~!”라고 소릴 지르며 동네를 뛰어다니던 아이들과 도깨비처럼 무섭게 그 뒤를 쫓던 할아버지......     

봉알 할아버지와 동네 사내아이들이 나름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던 그때......

그리고 어른들이 사내아이의 고추를 따먹는 게 애정의 한 표현이었던 그때......     


그때는 그랬다.

.

.

.

하루하루에 아무 의미라도 부여하고 싶은 소중한 봄 날의 주말이었다.

이곳 바닷가 광장엔 부모님을 따라 나온 아이들의 활짝 핀 목소리와 연인들의 달콤한 목소리가 뒤엉켜 듣는 것만으로도 꽃향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날씨는 화창했고, 먼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은 선선했으며 피고 지길 반복하는 벚꽃의 향연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주말의 봄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 곳 광장에 자전거와 아이들을 위한 소형 배터리 자동차를 대여해 주는 아저씨가 한 분 계셨다.

자신이 대여해준 자동차를 신나게 타고 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을 흡족한 모습으로 바라보시던 아저씨는 손님이 뜸해져서 인지 바닷가 쪽으로 향하셨다.     


그리고 자신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는 초등학교 4학년쯤으로 돼 보이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이야~~~ 너 운동하나 보구나 대흉근이 장난이 아닌데???”

아저씨는 아이의 가슴을 몇 번 찔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도 나이에 맞지 않게 체구가 좋은 아이였다.     


그런데 그때 아이의 할아버지쯤으로 보이는 어르신이 아저씨에게 다가가 큰 소리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어이! 당신이 뭔데 우리 아이 만져!”

아저씨는 당황하셨다.

“아... 저...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뭔데 우리 아이 만지냐고!”

“죄송합니다. 아이 덩치가 좋아 보여서 운동하냐고 물어본다는 게 그만......”

“미친...... 꺼져! 성질나니까!”

“죄송합니다.”

아저씨가 어르신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피하셨다.     


바로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봐왔던 나는 어르신의 반응이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일견(一見) 누가 보더라도 아저씨가 아무 사심 없이, 아주 가벼운 터치로 그 아이를 대했다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니 어르신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요즘 세태가 그렇기 때문이다.     


TV를 틀었다 하면 딸자식 키우는 부모들의 마음을 두근 반, 세근 반으로 만들 뉴스가 삼일이 멀다 하고 보도되고, 온갖 흉악범에 대한 소식도 모자라 강간하는 법을 공유하는 사이트까지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니 말이다.     


그러니 자신의 손자에게 신체 접촉을 한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화낼 수도 있겠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자전거 대여업을 하시는 아저씨를 감쌀 생각은 없다.

그 아저씨의 본심이야 어찌 됐건 다른 아이를 함부로 만져선 안된다는 게 지금 사회의 통념이기 때문이다.     

다만,

어른들의 고추 따먹기가 사랑과 관심의 표현 방식이던 그때......

소릴 지르며 무서운 봉알 할아버지를 피해 다니던 그때......

아이를 대하는 행동에 그 어떤 음흉함도 없을 거라는 서로 간의 믿음이 있던 그때가 그리웠다.

성(性)에 대해 훨씬 개방적이라는 지금보다 성에 대한 보편적 윤리의식이 더 높았던 그때가 그리웠다.     


불과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시골 버스에서 젖먹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배고파 우는 아이에게 하얗고 탐스런 젖가슴을 그대로 드러내 놓으면 작은 두 손으로 엄마의 젖을 움켜쥐고 꿀떡꿀떡 젖을 받아먹던 아이의 모습을 생활 속에서 자주 접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은 젖 먹는 아이의 모습에 관심을 보이거나 건강히 잘 크라고 덕담을 하시곤 했고 아저씨나 할아버지들은 창 밖 먼 곳을 보시거나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주셨다.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건만 그게 매너였으며, 그 속엔 그 어떤 음흉함이나 불신이라곤 없었다.

그런 게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성에 대한 서로 간의 신뢰를 떠나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기에 고추를 따먹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생활 속의 소소한 즐거움일 수 있었던 그런 때였다.     


그때는 그랬다.

그리고 그때가 그립다.

매거진의 이전글 < 곰탕집 두 여인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