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난 잠이 준 선물
새벽 세 시다.
어제는 두 시 사십 구분에 눈이 떠졌는데, 오늘은 세 시다. 시계를 보고 일어나 비틀거리며 거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두세 걸음 가다가 만난 희끄무레한 물체에 놀라 남아있던 잠이 마저 깨버린다. 우리 집 강아지는 제집 놔두고 꼭 사람 가까이서 잔다. 밤새, 두 개의 방을 오가며, 그것도 문지기처럼 문 앞에서 잔다. 지켜주는 건지, 보호를 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시간 안배를 하며 왔다 갔다 한다. 나만큼이나 피곤하게 사는 녀석이다. 조용히 움직였지만, 어느새 벌떡 일어난다. 목이 말랐는지, 물을 마신 강아지가 화장실로 직행한다. 나도 따라간다.
다시 돌아온 강아지가 자리 잡는 걸 확인하고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눈을 감을수록 정신이 점점 더 맑아진다. 푹 자고 일어난 아침보다 정신이 더 맑고 깨끗한 느낌이다. 불을 켰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노견 몽이의 눈망울도 나만큼이나 말똥말똥하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빛을 몰고 거실로 나갔다. 녀석도 따라 나온다. 낮에 대출해 온 책 중 《명랑한 중년. 웃긴 데 왜 찡하지?》를 꺼내 들고 자리를 잡았다.
제목만 보고 뽑아왔는데 글이 술술 읽힌다. 재미도 있고 맛도 있다. 그리고 맵다. 매워서 눈물도 난다. 이 작가는 글을 쓰면서 조미료라도 치는 걸까. 줄줄 읽히는 문장력이 부럽다. 친구 이야기, 아들 이야기, 시아버지 이야기, 남편 이야기까지. 소소한 이야기들을 북 치고 장구 치듯 흥겹게 풀어낸다. 흥겨운데 슬프고, 속상한데 웃음이 난다.
작가의 글쓰기는 어려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전라도 광주에서 대학 생활을 했다는 작가는 사 남매 중 셋째다. 바로 위 언니와 쌍둥이처럼 붙어 지내다가 언니가 뇌종양으로 투병하는 바람에 한동안 힘든 시기를 보냈단다. 완쾌된 언니는 엄마의 반대를 꺾고 공부를 하여 대학에 갔고 장학사가 되었으며 결혼까지 했다고 한다. 언니를 위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아 뿌듯해하는 마음이 행간에 가득하다.
잊지 못할 영화 <가버나움>의 아이들을 작가의 글에서 다시 만났다. 영화를 보고 거리를 떠돌던 실제 난민이었다는 아이들 얼굴이 문득문득 떠올랐었다.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았을 때, 자인이 인터뷰에서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슬프게 하라면 슬프게 했고, 행복하게 하라면 행복하게 하면 되니 영화를 찍는 게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곱슬머리 자인 알 라피아의 얼굴을 보며 ‘무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면, 소년이 돌보던 아기 요나스의 눈망울은 밤하늘 별 같았다. 다행히 자인은 영화 개봉 후에 노르웨이로 망명하여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영화배우로도 활동한다고 했다. 자인은 지금쯤 대학생이 되어 있지 않을까. 아기였던 요나스도 많이 자랐겠다. 변호사 역할을 한 감독을 빼고 모든 출연자가 난민이었다는데, 그들의 삶이 늘 기적의 ‘가버나움’이기를 기도하는 새벽이다.
지구별엔 81억 이상의 사람이 산다. 저마다 얼굴이 다르듯 재주도 다양하다. 취미도 다양하다. 나는 글 쓰는 ‘취미’가 있다. 쓰는 걸 즐기며, 내 눈에 보이는 것을 감상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글로 녹여 낸다. 그런데 분수처럼 쏟아지는 생각들을 두 손에 모아보지만 대부분 빠져나간다. 그중 잡힌 생각들을 줄 세워 정리하지만 역부족이다. 그걸 만회하는 건 노력이다. 그러다 도서관에 가면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는다. 세상엔, 아니 내 주위만 살펴봐도 글 잘 쓰는 사람이 정말 많다. 재밌게 쓰고 잘 쓴 글을 읽으며 공감하며 울고 웃는다. 그리고 ‘난, 왜 안 되지?’ 물음표로 다가갔다가 얼굴이 다르듯 나만의 표정이 있다는 위로의 느낌표로 돌아온다. 나는 내가 보고 느낀 것을 글로 쓰는 재미를 향유한 ‘취미人’이라며.
마지막 장을 덮는 것과 동시에 동녘이 서서히 밝아온다. 어느새 아침이다. 지난밤 수면시간을 손가락으로 헤아려본다. 숫자 5도 넘기지 못하는 걸 꼭 손가락 하나씩 꼽아볼 만큼 내게 잠은 소중하다. 그래도 어젯밤은 네 시간이나 잤다. 밤을 꼬박 지새우는 날에 비하면 감사한 일이다. 긴 잠은 놓쳤어도 놓친 잠이 아깝지 않은 건, 새벽 세 시에 읽은 책 덕분이다. 새벽 세 시에 받은 선물로 오늘도 뿌듯한 하루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