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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리 Dec 01. 2021

정신과 방문

솔직하게 말할게요

 기억이 사라졌다

내가 맡고 있는 협력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한참을 통화했고 전화를 끊은 후 몇 가지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오전 시간이 다 흘러갔다. 점심을 먹고 자리에 앉았는데 분명 아까 누군가와 업무 전화를 했는데 그게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옆자리 동료에게 혹시 나 아침에 어딘가랑 통화했는데... 어딘지 알아요?"라고 물었더니 대수롭지 않게 웃으면서 "OOO회사에 OOO랑 통화하시던데~" "아... 맞다. 그랬지~"


그런데 정말 심각한 것은 그래서 회사와 담당자는 기억이 났지만 통화 내용은 여전히 생각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건 뭐지....'

'우울이 치매로 발전한 것인가...'

'이대로 있다간 벽에 똥칠이라도 하는 건 아닌가...'


그때까지 나는 정신과라는 곳을 갈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밤마다 불면증과 우울감에 사투를 벌이고 있었음에도, 아침에 일어나서 그토록 무기력과 씨름을 하면서도, 그곳만큼은 내가 갈 곳이 아닌 것이다. 

머리에 꽃 꽂을 정도는 아니더라도 정상 범주가 아니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지는 곳이라 여겼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것은 스스로 용인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을 하다 기어이 용기를 냈다.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나름 이름이 괜찮아 보이는 정신과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정신과는 예약제로 운영이 되고 있어 상담을 받으려면 며칠 전 미리 상담예약을 해야 한단다. 하지만 오늘 이 순간을 놓치면 또다시 그곳을 갈 용기는 흐릿해질 것이 뻔했다. 그래서 무작정 '사람 하나 살리는 샘 치라며, 제발 오늘 좀 상담 받을 수 있게 해달라며' 막무가내로 정말 무대포로 사정했다. 통화만으로 증상이 심각하다 짐작한 것인지, 아님 목소리가 너무 불쌍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처음엔 단호하게 어렵다고 했던 간호사 선생님이 의지를 꺾고 정 그럼 지금 당장 오라고 했다.


그래서 당장 갔다.

잔뜩 긴장하고 문을 열고 들거간 그곳은 예상과 달리 따듯한 조명이 비치고 동심을 자극할만한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몽실몽실 떠있는 그림이었다.  안도감이 느껴졌다.

30분 정도 복잡한 검사를 하고 상담 시간이 돌아왔다. 화장기 없는 깨끗하고 단정한 여자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귀담아 들어주었고, 심지어 "음.... 힘들었겠어요." "그렇죠~ 맞아요"등의 온화한 추임새를 종종 넣어주었는데 그것은 마치 엄마 찾아 삼만리 소녀가 온갖 험난한 길을 헤매고 우여곡절 끝에 엄마를 만났을 때의 그것과도 같았다. 엄마품에 안긴듯한 아늑한 안정감.  


내 이야기를 다 듣고 검사 결과서를 보면서 그녀는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나의 상태는 우울과 불안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이며, 이런 상태란 극도의 스트레스로 마치 댐이 무너지듯이 마음이 더는 견디다 못해 쓰러진 것과 유사하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또한 그로 인해 뇌의 기능들 역시 현격하게 떨어지는데, 현재 회사 업무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억력과 집중력이 바닥이라고... 일상의 기본적인 것들을 처리하는대도 과거보다는 훨씬 많은 에너지가 필요로 하고 있어서 아마 저녁쯤에 극도의 피로감을 느낄 것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또 대부분 이 상태에서는 무기력으로 발전하는데 나 역시 무기력 상태가 심각한 상황이지만, 과거 개인의 성향이나 기질 자체가 매사 파이팅하면서 에너자이저 뿜 뿜 하는 캐릭터라 그때의 습관과 기억으로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대부분 이 정도의 상태에서는 스스로 병원을 찾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데 용케 와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그랬다. 우려와 선입견과는 달리 그곳은 내 상태에 대해 또렷한 해석과 함께 마음이 아프고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공감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왜 이런 건지, 어디서부터 무너져버린 것인지, 도무지 어떻게 하면 괜찮아지는 것인지...  

안갯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마치 누군가가 손전등을 비춰주는 것 같았고, 알 수 없는 수학 문제에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친절한 풀이집을 들여다봤을 때의 명쾌함이었다.


우선 약을 3일분을 주셨고, 놀랍게도 처음 약을 먹은 지 30분 만에 아무 일 없었던 사람처럼 컨디션이 좋아졌다. 심지어 우울감이 없어진 것도 모라자 당혹스럽기까지 할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아 맞아! 이런 게 기분 좋은 느낌이었지~ 내가 잃어버렸던 그 기분 좋은 느낌...""당장 퇴근 후 운동을 할까? 학원을 다닐까?" 없던 의지와 에너지가 급 솟구쳐 올랐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약으로 상태가 호전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다시 방문했을 때 선생님은 지금 당장 무리한 스케줄도 잡지 말고 최대한 에너지를 아끼라고 했다. 약은 일주일 정도만 더 사용해보자고 하셨다.

일주일 동안 약을 먹으면서 상당히 많은 도움을 받았다. 무너진 마음에 인위적으로라도 지탱해주는 근육이 만들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정신과는 나의 상태를 진단하고 앞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나를 돌봐야 할지에 대한 가이드를 제시해주었다. 그때 그곳을 막무가내지만 뒤늦게라도 찾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일주일 정도만 약을 먹고 더 이상 먹지 않았다. 약을 언제까지 계속 의지할 수는 없을 테니 조금 좋아진 현재의 컨디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고 싶었다. 현재 이 매거진에 써 내려가고 있는 것들이 그때 내가 생각하고 실천했던 방법들이다.


솔직하게 나를 알리다   


나는 정신과를 다녀온 후 나의 상태를 함께 일하는 동료와 가족, 친한 친구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도 알아야 내가 평소와 다른 패턴의 행동을 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말이나, 컨디션을 보일 때 해석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 주에 파트 회식이 있었고, 나는 동료들에게 실은' 너무 힘들어서 정신과를 다녀왔고 현재 나의 상태는 이러이러하다'라고 고백했다. 또한 '최근에도 어쩌면 느꼈겠지만  한동안은 집중력 저하와 기억력 감퇴로 업무 퍼포먼스가 좀 떨어질지 모르겠다. 다소 불편하겠지만 상태가 좋아지도록 노력할 테니 너그럽게 기다려 달라'라고 양해를 구했다.  다들 조금 놀라는 눈치였으나 충분히 이해한다는 공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팀장에게도 면담을 통해 나의 상황을 오픈했다. 그는 평소 말이 없고, 자기 세계가 명확한 분이었다. 어쩌면 내 상황을 오픈 하므로 최근 빙구처럼 실수 연발 한 것들이 오히려 부각될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많이 힘들었겠네요. 요즘 저도 마음이 힘들어 고민이 많은데 캠핑으로 과거엔 해소가 되었는데 요즘은 그것마저 쉽지 않네요'라며 혹시라도 내가 무안할까 싶은 배려였는지 자신도 비슷한 처지라는 말과 함께 위로를 보내주었다. 다행히도 그때 내 주변에는 함께 하기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솔직하게 고백한 나에게 그 누구도 어설픈 조언을 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저 내 이야기를 묵묵하게 들어주었다. 그 후로 10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 회사에 몸담고 있다. 그때 절뚝거리는 내 상태를 조용히 기다려준 동료들과 함께 말이다.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책 The Go Giver의 수용의 법칙에 이런 말이 있다. 효과적으로 '주는' 비결은 마음을 열고 '기꺼이 받는 것'이다.


삶은 어차피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고, 우리는 서로에게 뒤엉켜 삶의 모양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때론 오른쪽 치아가 아프면 왼쪽 치아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더 많은 일들을 하고 있고, 한쪽 근육이 손상이 오면 자동으로 다른 쪽 근육으로 힘이 쏠리는 것처럼,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돌발상황이라는 것은 일어난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것 같지만 누군가에게 이해를 구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려야 하는 경우를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 전제가 되는 것은 솔직함이더라. 먼저 나에 대한 보호막을 내려놓고 솔직하게 먼저 자신을 오픈할 때라야 상대로부터 이해받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또한 이렇게 이해받은 기억은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넉넉함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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