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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Jun 29. 2021

친구의 추억 (2)

어느 날 그렇게 친해졌다


“누가 엄마래? 미친년.”


확실히 들었다. 우현이 어머니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관문이 다시 열리지는 않았다. 우현아, 어머니에게 그게 무슨….


우현이를 따라 신을 벗고 (다시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는 것도 그 당시에는 문화 충격이었다) 거실로 들어섰다. 앞서 본 자동차와 너른 잔디 마당은 그저 예고편에 불과했다. 내가 본 그날의 풍경을 전부 묘사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 간단하게 그냥,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회장님 집 거실이라고만 해 두자.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현이는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이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밟는데 소리가 울렸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너른 집에 사람의 온기溫氣가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가방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우현이가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방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한쪽 벽을 꽉 채운 높은 책장, 선반마다 빈틈없이 꽂혀있는 책들, 커다란 침대, 푹신해 보이는 작은 소파, 스탠드가 붙은 책상, 바퀴가 달린 의자, 우리 것보다 큰 텔레비전, 역시 책장만큼 큰 옷장. 그러고도 내 방보다 넓은 공간이 남았다. 놀람의 연속이었지만 애써 표를 내지 않았다. 공연히 창피했다.


나는 책을 한 권 빼들고 소파에 앉았다. 기분 좋은 푹신함이 느껴졌다. 오분 정도를 말없이 책장만 넘기고 있었다. 갑자기 우현이가 뭔가 생각났다는 투로 말했다. “우리, 쇼핑하러 갈래?” “쇼핑? 니는 사고 싶은 게 있나? 돈이 있어야 쇼핑을 하지.” 생각 없이 뱉은 말에 우현이가 피식 웃었다.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서랍 하나를 쑥 뺐다. “이거면 되겠어?” 뭔가 싶어 나는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나, 서랍 안에는 놀랍게도 돈, 아니 지폐가 가득했다. 그것도 천 원, 오천 원이 아니라 전부 만 원 짜리였고 중간중간 묶은 돈도 보였다. 차곡차곡 정리한 게 아니라 그저 퍼담은 꼴이었다. “이게 무슨 돈이고?” 놀란 나를 보며 또 웃었다. “가지고 싶으면 가져가도 된다.”


하지만 그 말은 유쾌하게 들리지 않았다. 얼른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야야, 실없는 소리 그만 하고. 우현아, 배고프다. 라면 묵자.” 서랍 닫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우현이를 떠밀다시피 하며 방에서 나왔다.




세상 모든 부엌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 같은 부엌이 거기에 있었다. 단순히 부엌이라고 부르려니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 집 마루보다 너른 '주방'에 들어서서 우현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더 이상 무언가를 넣을 수 없을 만큼 꽉 찬 냉장고는 동네 슈퍼마켓 하나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오렌지 주스부터 콜라, 사이다, 햄, 치즈, 소시지, 계란, 바나나, 파인애플 등등.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배가 불렀다. 우현이 방보다 냉장고가 더 부러울 정도였다. 나는 바보처럼 또 묻고 말았다. “이거 공짜로 먹어도 되나?” 그 말에 우현이가 이번엔 허리를 젖혀가며 웃었다.


싱크대 옆의 문을 열자 각양각색의 라면이 보기 좋게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우현이가 내게 고르라는 눈짓을 했다. “라면은 종류보다 갯수지. 나는 두 개, 니는?” 우현이도 마찬가지로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끓는 물에다 스프와 면을 넣은 다음, 냉장고에서 햄과 소시지를 꺼내 대충 잘라서 냄비에 같이 넣었다. 계란을 챙겨 들었다. 우현이가 신기한 듯 그걸 쳐다보았다. 각자의 접시를 챙기고 이제 막 끓기 시작한 냄비 뚜껑을 열려고 할 때였다.


타앙.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거실을 가로질러 왔다. 우현이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나는 식탁에 앉은 채로 발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들었다. 그새 어머니가 돌아오셨나? 우현이가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술냄새가 먼저 몰려왔다. 조심스럽게 돌아보니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아버지라고 불렀으니 당연히 우현이 아버지인 듯했다. 나는 인사를 하려고 일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우현이 친구…….”

“시펄, 넌 뭐 하는 새끼야? 누군데 남의 집에 함부로 기어 들어왔어?”

“아버지, 그게 아니구요, 제 친구예요. 같이 공부…….”

“빨리 꺼져, 이 개X끼야.”


당황스러웠다. 나는 도망치듯 우현이 집을 나와야 했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했으니 쫓겨나는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우현이는 배웅조차 하지 못했다. 신 한 짝을 손에 들고 잔디 마당에 내려섰을 때 집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잰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밖으로 나왔다. 달빛을 받은 흰색 그랜저가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다.




주말 동안 우현이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불편함의 주된 이유는 걱정이었다. 전화를 걸어 보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질 않았다. 행여 아버지가 받으시기라도 하면. 그냥 별일 없겠지, 학교에 가면 알 수 있겠지. 그러나 월요일, 우현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결석이었다.


다음날, 그것도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교실에 들어서는 우현이를 볼 수 있었다. 교무실에 다녀오는 길이라고만 할 뿐 특별한 말은 없었다. 나도 달리 말하지 않았다. 그냥, 다행이다. 학교에 왔으니 그걸로 된 거다. 괜찮다, 우현아.


6교시는 체육 수업이었다. 내 앞에서 우현이가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때 얼핏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우현이의 허벅지, 팬티 아래의 허벅지가 퍼렇다 못해 새카만 멍으로 덮여 있는 것이었다. 우현이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저 정도면 걷기도 힘들 텐데. 마치 내가 맞은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체육 선생에게 달려가 오지랖을 부렸다. 전우현이라는 학생이 몸이 안 좋아서 양호실에서 쉬게 했으면 좋겠다.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난 체육 선생이 내 뺨을 두어 대 후려갈겼다. 훈훈한 공감共感이란 애초부터 없었던 거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우현이를 도울 수 없어서 속상하고, 또 미안했다.




며칠이 지나고 다시 토요일이 되었다. 이번엔 내가 우현이를 끌고 데리고 우리 집으로 갔다. 걸음걸이가 아직도 시원찮았다.


부업副業으로 스웨터 실밥을 뜯고 있던 엄마가 우현이를 반겨 주셨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잘 생겼다는 칭찬부터 하셨다. 우현이가 신기한 듯 내 방을 둘러보았다. 손바닥만 한 방이라서 나란히 앉으니 꽤 비좁았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식사 시간이 되자 늘 먹던 밥과 반찬에 숟가락 하나를 더 올렸고, 특별히 계란 프라이를 해 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우현이가 그것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밥은 당연히 두 그릇이었다.


퇴근이 조금 늦으셨던 아버지도 우현이의 인사를 받으시더니 '잘 생겼구나' 그 말씀을 하셨다.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우현이는 어울리지 않게 쑥스러워했다. 이 녀석, 얼굴 붉어지면 안 되는데, 아,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얼굴의 상처가 안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현이를 슬쩍 쳐다보았다. 하지만 상처는 그대로였다. 다만 내가 한동안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신기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언제든 다시 오라며 엄마가 대문간에서 서운해하셨다. 버스 정류장까지 내가 배웅했다. 걸어가는 동안, 우현이가 뜻밖의 말을 했다. 우리 집에서 하루 자고 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상관없다고, 얼마든지 그러라고, 다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곧 녀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싶은데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을 했다. 순간, 허벅지에 박혔던 시퍼런 멍이 떠올랐다. 버스에 올라 손을 흔들던 우현이가 저만치 멀어질 때까지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여름 방학이 이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날도 역시 토요일이었다. 쉬는 시간에 우현이가 몸을 돌렸다. “내일 나랑 남포동 가자. 영화 보자. 내가 보여줄게.” 영화? 무슨 영화를 볼 거냐고 묻기도 전에 우현이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영화 한 편 보러 가는데 조건까지 있어? 여전히 궁금해하는 내게 다짐이라도 받을우현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일, 반드시 구두를 신고 와야 된다. 알겠지?”


(3편에 계속됩니다)



Image of Song-jung Beach By Jin 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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