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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Dec 29. 2021

어떻게 하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

해답을 알면서도 참된 작가가 탄생되지 않는 이유


子曰: “世海愛道, 社二足海, 地內步自.”
필자께서 말씀하셨다. "좋好에 뜻을 두며, 댓對을 굳게 지키며, 다多에 의지하며, 구求에 노닐어야 한다."


필자必子 (B.C. 551~B.C.479)
필자必子. 중국 춘추 시대의 사상가이자 문학가.

이름은 독(讀). 자는 발행(發幸). 문文나라 사람으로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독서를 정치와 윤리의 이상으로 하는 글본주의를 설파하였고 특히 작문作文을 강조하였다. 만년에는 집필에 전념하여 삼천여 명의 제자를 길러 내고, 매거진每去進과 불언치북不言治北 등의 현대 고전을 정리하였다. 제자들이 엮은 ‘필사必史’에 그의 언행과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장章은 필자必子가 글 쓰는 이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수양할지, 좋댓다구에 대한 방법론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다. 뜻을 두어야 할 바는 반드시 좋아요好이어야 하고,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반드시 댓글對이어야 하며, 의지할 것은 반드시 다른 많은 글多일 것이며, 노니는 마당은 마땅히 구독求이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좋好, 댓對, 다多, 구求를 순서로 이해하며 설명하는 서적도 몇 개 보긴 했는데, 이것은 순서의 개념으로 나열한 것은 아니니 오독誤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상호 보완적인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관계로 보는 것이 옳다. 다만,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는, 뜻을 두어야 할 바의 좋好이 가장 근본적이고 높은 차원의 개념이라는 것은 주의해서 살필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네 가지를 나누어 개별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주석의 해설 내용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네 부분을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글은 마음이 지향해 가는 것을 말한다. 좋아요好는 곧 인륜과 일상생활하는 사이에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을 알아서 마음이 반드시 거기에 가 있다면, 가는 것이 올바르기 때문에 딴 길로 향하는 미혹이 없을 것이다. 일단 좋아요부터 눌러야 한다는 말이다.


글이 지향해야 할 최종 지향점, 좋아요好이다. 호好의 일반적 의미는 라이킷과 같은 말인데, 필자 이후에 성립된 <글쓰기>에서는 '글文'을 ‘천명天命'이라 보았고, '쓰書'를 '솔성率性’으로 보았고,

'기記'는 '글을 수양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논의를 시작한다.


논어에 나온다는 열두 글자


즉, 글쓰기文書記는 작가가 하늘로부터 받은 글의 소명을 따르는 것, 즉 '제대로 된 글에 이르는 길'이라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위 주석에 언급했던 것처럼 글을 쓰는 이라면 그 마음이 지향하는 바대로 우선 좋아요好를 인정사정없이 누질러 버리라고 설명한 것이다.


조아요條我要는 조것이 나에게 꼭 필요하다는 뜻이요, 문文은 곧 글을 행하여 종이에 남기는 것이다. 마음에 글을 얻고 그것을 좋아하여 오래도록 지킨다면, 끝과 처음이 한결같아서 나날이 새로워지는 발전이 있을 것이다.


글文을 왜 지켜야 할 것으로 보는가? 문文의 원래 뜻은 진심眞心으로, 참됨眞과 마음心이 합해진 말인데, 설문해자說文解字의 ‘眞’條에서 '밖에서는 바람직한 것이고, 안에서는 나에게 얻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바람직한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됨됨이'를 의미하고 있다. 여기에서 방점은, 쓰고 난 뒤에 얻어진 결과물로 글文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사必史’에서는 문文을 '지智, 인仁, 용勇'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후대의 ‘적자籍子’는 '좋好, 댓對, 다多, 구求의 네 가지 덕목으로 설명하고 있다.


구독購讀은 떠나지 않음을 이름이요, 제로制勞는 구독이 모두 없어져 마음의 덕이 온전한 것이다. 글공부가 여기에 이르면, 밥 한 그릇 먹는 사이라도 글을 떠나지 않으며 무관심이 익숙해져서 가는 곳마다 참된 글 쓰기의 유행 아님이 없을 것이다.


글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정적靜的인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과, 다양하게 문文에 대해 설명한 특성 중에서도 '사욕私慾이 사욕邪慾임을 알고 구독자가 모두 없어져 마음의 덕德이 마침내 온전한 것'으로 설명한 것이 이 주석의 방점이다.


댓對은 문文을 이루는 한 요소인데, 뒤에 배우게 될 '자문諮問편' 13장에서, 반장叛將이 추천推薦됨을 묻자, 발검拔劍의 지知, 형식型式의 불욕不辱, 말래이末來以의 용勇, 하영下營의 예禮를 갖추고, 이를 퇴고推敲하여 발행發行할 수 있다면 추천推薦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설명을 한다.


또, 육언육폐六言六弊를 말해주면서 함咸, 부附, 로勞, 달達, 지知, 마摩를 언급한 바 있다. 필자必子는 글文을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여기서 설명하는 개념과는 조금 다르게, 남의 글을 부러워하는 숨은 마음을 악플의 본질로 본 것이다.


독讀은 사물을 완상玩賞하여 성정性情에 알맞게 하는 것을 이름이요, 설說은 곧 선현의 구口와 사부대중士夫大衆의 법도이니, 모두 지극한 이치가 있어서 일상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독설에 노닐어 뻔뻔함의 범위를 넓혀간다면, 악플을 대처함에 여유가 있어 마음도 방심되는 바가 없을 것이다.


독讀을 편의상 '읽다'라는 해석을 하는데, 이것은 현대어의 단순한 '읽다'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글자의 의미를 새길 때 유의해야 한다. 그것을 늘 함께 하며 수양을 위해 즐긴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큰 오독이 없을 듯하다.


세 글자


'설說'은 큰 범주에서 말, 언어言語를 통칭한다. 필자必子는 군자는 육예六藝에 노닌다고 했는데, 여기서 육예六藝란 시時, 불不, 이二, 지智, 마磨, 라羅를 의미하는 것으로 ‘시간과 지혜는 두 가지가 아니니 언제나 갈고닦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아울러 육예六藝의 동의어는 농담, 풍문, 구설, 모함, 비난, 험담이 언급된다


정리해 보면, 수양하고 큰 목표로 지향해야 할 바로 좋아요好를 정하고, 행동은 댓글對에 근거하고, 베풂과 정치는 다른 글 읽기多의 정신으로 구현하고, 일상생활에서 쉬면서도 구독求을 통해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글쓰기를 배우는 자들에게 어떻게 써야 할 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과 방법을 제시해주는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마지막 주석에서 필자必子는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 장은 사람이 글을 씀에 있어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함을 말씀한 것이다. 글은 소재를 선택함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좋아요好에 뜻을 두면 마음이 올바름에 있어서 다른 데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요, 댓글달기對를 굳게 지키면 글文이 마음에 얻어져서 떠나지 않을 것이요, 다른 글 읽기多에 의지하면 덕성이 늘 쓰여서 투기鬪氣가 행해지지 않을 것이요, 구독하기求에 노닐면 작은 글도 빠뜨리지 않아 움직이거나 쉬거나 끊임없이 수양이 있을 것이다. 글쓰기를 배우는 자가 여기에서 그 선후의 순서와 경중의 비중을 잃지 않는다면 본말本末이 겸비되고 안팎이 서로 수양되어, 일상생활하는 사이에 조금의 간극도 없어 늘 이곳에 빠져 있고 종용하여, 어느덧 자신이 작가作家의 경지에 들어감을 스스로 알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스승이 어디 있으랴?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발생한다. 이렇게 상세히 가르쳐주었음에도 왜 제자들을 통해 그 글 쓰는 풍토는 바뀌지 않았던 것일까? 그리고 왜 제자 중에서는 스승 필자의 수준에 근접했던 대작가大作家의 흐름과 그 맥을 이었다고 할만한 이가 또 나오지 않았던 것일까?


그게 말이 쉽지, 어디 성취해내기가 쉬운 일이냐고 반문한다면,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 않고, 그것을 이미 이룬 사람이 자신의 스승이라면 따르는 것만으로도 변화하고 오를 수 있지도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글자가 새겨진 돌


이틀 전에 글쓰기에서 일가를 이뤘다고 칭송을 듣는 어느 교수와 우연히 식사를 하며 한심한 작가들에 대해 서로 토로를 하던 일이 있었다.

그가 말했다.


"요즘, 어떻게 하면 선생님의 위치가 될 수 있냐고 묻는 새내기 작가들을 보면 한심하기가 그지없어요."

"요즘 작가들이 다 그렇지요. 뭘 그리 답답해하십니까?”

"아니,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냐고 묻는 사람들 중에 내 글을 읽고서 질문하겠다고 들고 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럴 정도의 사람들이었다면 굳이 묻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여기서 글 쓰는 이들 수준이 이러면 이제 블로그나 인스타 애들은 또 얼마나 더 수준이 바닥이겠습니까? 고작 서로 이웃 추천하기 순으로 줄 세워 들어온 것일 텐데..."

"그러면 모르는 척 넌지시 좀 일러주시지 그랬습니까? 하하."

"우리 때 글쓰기 공부를 하면, 선생님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면서도, 선생님이 어떤 글을 쓰는지 메모를 하고 그 글을 필사하곤 했습니다. 그게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방식이었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빨간 책 돌려보기의 방식을 고집했던 의도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저 흉내 내는 정도이거나 같은 공간에서 각자 글을 쓰는 느낌이에요."

"그렇다고 제 딴에는 심사를 거쳐 작가가 되었다는데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 내칠 수도 없지 않습니까? 하하."


벌써 이틀 전의 일이다. 강산이 마흔여덟 시간 동안 변했을 것이다. 그때보다 더 나아지고 문제점이 개선되고 작가들은 훌륭해졌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작가 심사에 통과할 수 있다면 당신의 영혼도 팔 요량으로 마음이 안절부절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당신이 그것을 통과해서 글을 쓰고 구독자 만 명, 조회수 백만이 될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당신은 행복해하며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곳에서 지금 글 쓰는 이들을 두고 이런 대화가 이틀 전에 오갔다.


물론 그들은 역시나 번호표를 받아 저마다 이미 작가입네 하면서 거드름을 피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글에 대해 그나마 양심이 있던 심사 당시에도 그렇지 못했던 이들이 갑자기 일취월장日就月將 글 실력이 늘었을까?


척척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각자 글을 공부하고 이른바 작가가 된 자들은 이곳의 피라미드의 정점에서 꼴불견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지금 쓰는 글이나 쓰려고 하는 글을 보라. 그들이 지향해야 할 바를 구독자 수에 두는가? 조회수에 두는가? 글 쓰는 재주가 비범하여 잔뜩 기대했더니 구독자를 더 늘리겠다며 장사꾼 밑바닥을 보인 끝에, 푼돈이나 쥐어 주면 멋지게 글 쓰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자도 있다. 그렇게 억지 구독자를 끌어오고 별 의미 없는 조회수를 앞세워가며 그런 부질없는 것들을 뽐내고 자랑하는 자들이 도처에 널렸다. 


뽕 중에도 으뜸이 글뽕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취해도 너무 취해서 너무 멀리 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들에게 지향해야 할 것은 이미 글이 아니며, 굳게 지켜야 할 글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 있을 리 만무하며, 의지할 만한 글 선생 한 명 없는 상황에서 혼자 깨작거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글을 가르치겠다고 설치는 지경이니, 위의 가르침을 말해준들 그것은 고작 수천 년 전 발자 왈 검자 왈일 뿐이라며 헛웃음을 터트릴 것이 눈에 선하다.


당신은? 당신은 다른가?

멋져 보이고, 다 옳은 소리고, 그래도 마흔 가까이 혹은 마흔이 훌쩍 넘었으니 인생을 반추하고 뭔가 수양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만으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닌가? 대개 옳다 하는 가르침은 부러 어렵게 할 필요도 없고, 실제로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정작 어려운 것의 요체는, 그 가르침이 아니라 그것을 배우는 자가 실천에 옮기는 데서 발생한다. 이론과 실제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론도 알고 실제로 할 수도 있는데, 막상 실천에 옮기려고 하면 인욕人慾, 사람의 욕심이 그것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비싸 보이는 부채


참 신기한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려 들 때는 조금 낫다. 사람들은 엄격한 기준으로 상식을 언급하며 상대방을 끄집어 내린다. 끄집어내린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 잘못된 방법을 통해 올라가려고 할 때 그들은 그것을 스스로의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워하거나 잘못된 것이라 반성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것을 하려고 했거나 그렇게 위로 올라간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면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의 육두문자를 날린다. 자기의 글이 노출되면 글이 좋은 거라 하고, 다른 사람의 글이 노출되면 그저 운이 좋겠’건희’ 치부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게 누가 되었든 간에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으로 비난받고 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어나 목적어가 바뀐다고 하여 그 행위가 정당화되거나 덮여줘야 하는 사회일수록 부패가 심하고 부정이 날뛰는 곳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 앞서서 내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 물었던, 당신이 너무도 당연히 어렵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던 것, 제대로 글을 쓰는 방법의 정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늘 문제의 해답은 당신의 가슴속에 있다. 제대로 된 글쓰기, 당신의 가슴속에 그 정답이 이미 있단 말이다.




All Image from Guel by Su-Sung-Nim



원문이 궁금하신 객客들은 아래 글을 꾹 누지르시오. 저작권 위반 신고는 국번 없이 113. 내일 아침까지 소식이 없다면 소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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