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불라불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우 Jul 06. 2022

전용 차로 위의 할머니

할 수 있다면 늙지 마소


   끼이이이이익. 빠아아아아앙.


   지면地面을 물어뜯는 타이어 소리가 성난 경적과 함께 귀를 찢을 기세였다. 버스 기사가 급정지를 한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저마다의 화난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아저씨, 왜 그래요? 다칠 뻔했잖아요!"

   "아니,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위기의 순간을 누구보다도 맨 앞에서 경험했을 기사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며 연신 사과를 했다.

   “아이고, 정말 죄송합니다. 어디 다치신 분, 없으세요? 저기에 사람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마침 내릴 준비를 하며 섰던 나는 앞 유리 너머를 쳐다보았다.


   시내 중심지인 서면西面을 가로지르는 버스 전용 차로 위. 거기에 기사의 말대로 누군가가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느린 걸음으로 걷는 중이었다. 허리가 꽤나 굽은 걸로 봐서는 연세가 지긋한 노인인 것 같았다. 버스 전용 차로를 따라 나란한 방향으로 걷고 있음을 노인의 걸음이 말해주었다. 하필이면 회색 블라우스에 짙은 검정 치마 차림, 그 색의 조합은 아스팔트와 쉽게 구별되지 않았다. 급정거를 하지 않았더라면 실제로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에 오히려 기사에게 고맙다는 마음마저 들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낸 기사가 다시 차를 출발시켜 노인의 뒤에 바짝 붙었다. 또 한 번 경적을 울렸다. 빵빵 빵빠바바바방. 짜증과 분노가 섞인, 다분히 신경질적인 손놀림이었다. 하지만 어떠한 반응도 없이 노인은 가던 길을 계속 갈 요량인 것 같았다. 그대로 뒀다간 뒤로 꼬리를 문 버스들도 정체되고 결국 저분마저 위험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버스 앞쪽으로 갔다. 기사가 창문 밖으로 머리를 막 내밀려던 참이었다.

   “기사님, 여기서 내려 주시면 제가 저분을 길 밖으로 모실게요.”

   그 말을 들은 기사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그렇게 해 주실랍니까?”

   어차피 다음 정류장에 내려야 했기 때문에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치이익 앞문이 열렸다. 나는 재빨리 노인에게로 달려갔다.


   “저기요, 어르신. 어르신.”

   대꾸가 없었다. 나는 노인의 옷깃을 잡았다.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옷차림은 남루했으나 예상과는 달리 인상이 고운 할머니였다. 무슨 일인가 하는 놀람과 의아함이 얼굴에 역력했다.

   “할머니, 여기는 버스 다니는 길이에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귀가 어두운 것 같았다. 나는 손으로 앞뒤를 가리켜가며 큰 소리로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할머니, 여기는 차가 다녀요. 위험해요. 저랑 빨리 저 쪽으로 가요.”

   할머니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앞뒤를 돌아보았다.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 방금 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제 겨우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이고, 이를 우짜노. 나는 저기 병원만 보고 걸었는데, 아무 소리도 안 들렸는데. 여기가 차 다니는 길이었구나. 이거, 미안해서 우짜노.”

   자초지종을 듣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할머니의 팔을 부축한 다음, 나름의 가장 빠른 걸음으로 우선 찻길을 벗어났다. 버스가 천천히 내 옆을 지나쳤다. 열린 앞문으로 기사가 나를 향해 살짝 고갯짓을 했다. 겨우 안심이 되었다.


   “할머니, 어디 가시던 길이에요?”

   “으응, 나는 저기 한방 병원에 갑니다.”

   할머니가 가리킨 곳에 과연 병원이 있었다. 더* 한방 병원. 거리는 백여 미터 남짓 되었다. 병원에 가려면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데 느린 걸음의 할머니를 병원까지 혼자 가게 두려니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힐끔 시각을 확인했다.

   “할머니, 제가 병원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제 손을 잡으세요.”

   다시 할머니의 팔을 부축했다. 십이 년 동안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신 내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에게서 나던 냄새가 이 할머니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싫지 않고 오히려 정겹고, 익숙했다. 나이가 들면 모든 사람에게서 이런 냄새가 나게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최근 들어 허리와 무릎이 부쩍 안 좋아져서 이미 한 달째 병원을 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기력이 약해지는 것도 문제지만 갈수록 기억력이 흐려진다고 했다. 분명히 어제와 같은 곳에 내렸는데 왜 오늘은 그 길을 걸었는지, 하필이면 버스 전용 차로 위를 걷게 되었는지 본인은 전혀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말을 덧붙였다.

   “버스 기사 양반한테 억수로 미안하다고 좀 전해주세요.”


   느린 걸음 때문이었을까? 고작 백여 미터를 걷는 동안, 할머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참 많이도 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으나 아들 자랑만큼은 빠지지 않았다. 큰 회사에 다니는 효자라고 했다.


   병원 복도 의자에 할머니를 앉게 한 다음, 내가 대신 접수를 했다.

   “할머니, 저 간호사 선생님이 할머니 이름 부르면 저기로 들어가셔서 침 맞으시면 돼요. 저는 이제 그만 가볼게요.”

   할머니가 허공에다 손짓을 했다. 한 걸음 다가갔더니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거기에다 무언가를 꼭 쥐어 주었다. 손을 펴 보았다. 그것은 알사탕 한 개였다. 할머니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젊은 양반, 오늘 고맙소. 그리고…”

   “네, 할머니.”

   “할 수 있다면, 절대로 늙지 마소. 늙으면 불편한 게 너무 많아요.”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병원 밖으로 나와 시계를 보았다. 약속 시간에 조금 늦을 것 같았다. 하지만 굳이 서둘지는 않았다. 생각할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내내 손바닥 안의 알사탕을 나는 한참 동안이나 만지작거렸다.




* Image by Sabine van Erp from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아동 학대를 향한 당신의 시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