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는 어머니가 있는게 아니고 아내가 있는 거였습니다.
아내
이 단어가 눈에 띈 것은, 한참 수업이 진행되던 중이었습니다. 정지용의 시 ‘향수’를 강독하는 중에 ‘사철 발 벗은 아내’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온 순간입니다. 시 4연에서 ‘어린 누이’와 ‘아내’가 언급됩니다. 2연에서는 ‘아버지’가 등장하고요. 화자가 기억하는 고향에서의 가족 구성원은 아버지, 누이, 그리고 - 어머니가 아닌 - ‘아내’였던 것이지요. 그동안 그렇게 여러번 시를 봤는데, 수업을 했는데, ‘아내’가 등장한다는 이 사실이 왜 이제야 눈에 띄었을까요.
‘아내’라는 단어가 섞여 들어감으로써, 화자가 말하는 ‘그곳’은 그의 어린시절로만 국한되지 않고 꽤나 긴 시간의 폭을 갖게 됩니다. 3연의 ‘활쏘기’가 어린 시절을 그려낸 것이라면, 4연의 ‘아내’는 아내가 있는, 어느 정도 성장한 남성으로서 생활이 그려집니다. (물론, 작가 정지용은 12살에 이미 나이 많은 아내와 결혼(즉, 조혼) 했다하니, 청년 정도로 성장한 시기까지를 작품에서 그려낸 것은 아닐 것입니다만…)
시 ‘향수’는 읽으면 읽을수록 그저 낭만적으로만은 보기 힘든 어떤 아픔이 담겨있는 시가 아닐까 합니다. 고향의 모습을 그려내는 시구들이 아련함을 담고 있다 할 수 있겠지요. 초라한 지붕, 성근 별, 졸음에 겨운 아버지(피곤함?),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을 주워야 하는 어린 누이와 아내의 모습, 재가 식어가는 질화로와 흐릿한 불빛, 그리고 알 수도 없는 모래성 같은 표현들은 흔히 생각하는 낭만적인 고향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요? 오히려 삶이 가진 팍팍함이 조금 더 표현이 된 거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를 생각해보면, 그의 삶의 모습은 평탄보다는 오히려 굴곡이 맞아보입니다. 상실과 아픔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어떤 삶의 고통과는 거리가 먼 아름다운 고향의 모습에 대해 시를 썼을 거라는 기계적 판단이 이 시를 낭만적으로 보이게 하는 결과를 낳지 않았을까요? 부정적 현실 VS.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구도라면, 고향이 긍정적인 곳으로 그려질 수록 이 구도가 강하게 전달될 테니까요. 혹은, 현실의 어려움이 너무나도 강하다보니 과거나 고향의 생활이 덜 고단하게 느껴질수도 있는 것일까요?
시에서 ‘사철 발 벗은, 아무렇지도 않은 아내’는 신비로운 느낌의 ‘어린 누이’와 대조적으로 그려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신비로웠던 어린 누이가 결국은 누군가의 ‘아무렇지도 않은 아내’가 되는 곳이라는 이야기로 읽었더랬습니다. 신비롭건, 그 신비로움이 지나갔건, 어쨌든 따가운 햇살 아래서 이삭을 주워야 하는 그곳으로 말이지요.
어떤 이유에서건, 수수하게 그려진 여인을 별 생각 없이 ‘아내’가 아닌 ‘어머니’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점은 이유 모를 반성을 하게되는 지점이 됩니다. 시 ‘향수’에 나타난 고향에 관한 기억 중에 어머니가 아닌 ‘아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낯설게 다가온 순간이었습니다. 익숙함이란 이렇게 나를 멍하게 합니다. 아니, 익숙해져있었구나 하며 뭔가를 다시 알게되는 일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