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II제이 Mar 31. 2023

치발기 (23년 4월 상순의 순간)

뭔가를 하는데 쓰인다기 보다는, 뭔가를 하는 것을 위해 뭔가를 하는.


치발기


  이가 아직 나지 않은 아기들에게 쥐어 주어 빨고 물게 하는 도구. 별, 달, 바나나, 꽃, 작은공 등 여러가지 모양이다. 아기가 물라고 의도된 곳보다는 그렇지 않은 부분이 더 많이 물린다. 잇몸을 자극해 이가 나게 하지만, 막상 이가 나면 쓰지 않는다. 종종 끓는 물에 넣어 삶거나 소독기에 넣어 소독한다. 늘 침이 묻어 번들번들하다.


  아기는 자기가 이 치발기를 썼었다는 걸 기억할 수 있을까. 아기는 입이 눈이고 코고 귀라 한다. 감각을 깨우는데 소용된 이 도구, 늘 씹히지만 부드럽고, 깨문 자국은 남지 않는 이 도구, 곧 큰 관심도 받지 못한 채로 관심 밖의 사물이 될 이 도구. 지나가는 도구. 이를 나게 도와주는 도구. 즉, 그 자체로 뭔가를 하기보다는 뭔가를 하기 위한 뭔가를 위한 도구. 


  치발기가 부모가 될 순 없지만, 부모 역할 일부를 치발기가 해 주는 것이 사실이다. 부모가 치발기 같기만 하다면 부족하겠지만, 치발기 같은 부모의 역할도 필요하겠지. 만약 치발기 같은 부모가 있다면 그는 어떤 사람일 것인가. 나는 치발기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갖는데 도움이 되는’, 그런 사람. 


  아직 이가 나지 않은 8개월 막내를 보며, 치발기를 덜 씹혀서 이가 안나나 걱정을 하며, 나의 부모됨을 또 생각해보며, 일부러 발음을 되게 해본다. 치발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