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비워야 채운다

꾸뻬 씨의 행복 여행 / 썸원 그레이트 / 100 Things

by 현재

어느 날 문득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문제를 느끼지 못했는데, 오늘은 갑자기 그동안 내내 잘못됐던 것 같기도 하다.


불편한 옷의 종류는 다양하다. 다니던 직장이거나, 생활 습관, 혹은 오래된 인간관계일 수도 있다. 더 이상 맞지 않는 옷을 계속 입고 있는 것은 미련한 이지만, 이미 정들어버린 옷을 벗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변화를 원한다면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순 없으니까.


그런데 당장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썸원 그레이트 (2019) / 꾸뻬 씨의 행복 여행 (2014) / 100일 동안 100가지로 100퍼센트 행복 찾기 (2018)



불편은 변화의 신호


불편함은 변화의 신호다.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상황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는 매일 다른 경험을 하고 새로운 정보를 수용하며 끊임없이 성장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 맞던 옷이 오늘 갑자기 불편해질 수도 있다. 하루 만에 급성장한 게 아니다. 내내 조금씩 몸이 변화하다가 이제 더 이상은 같은 옷을 입을 수 없을 정도로 커버린 것이다. 이제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할 때가 왔다는 신호다.


<썸원 그레이트>의 주인공 제니(지나 로드리게즈)와 네이트(러키스 스탠필드)는 올해로 9년 차인 장기 연애 커플이다. 20대의 모든 순간을 함께해온 이 커플은 제니가 다른 도시에 직장을 갖게 되면서 이별을 맞이한다. 네이트의 갑작스러운 이별통보에 제니는 큰 충격을 받지만, 사실 둘의 이별 사유가 단순히 제니의 이사 때문만은 아니다.


9년이라는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성장했고, 그들을 둘러싼 모든 상황 또한 변했다. 여전히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처음 만났던 순간의 감정은 아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는다. 제니가 뉴욕을 떠나지 않는다고 해도 둘은 결국 이별했을 것이다.


널 처음 만났을 땐 모든 게 새로웠고
세상은 가능성으로 가득했어.
지금도 너와 나의 가능성은 무한해.
하지만 '우리'는 없지.
사이는 멀어졌지만 우린 어른이 됐어.

- <썸원 그레이트>


목숨을 걸고 탈피를 하는 가재처럼, 입고 있던 갑옷을 벗는 것은 다양한 위험과 많은 아픔이 동반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견뎌내야지만 비로소 내 몸에 잘 맞는 옷을 몸에 걸칠 수 있다. 입고 있던 옷을 벗지 않으면 새로운 옷을 입을 수 없으니까.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던 제니는 결국 9년 전과 지금은 많은 것이 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동안 진정으로 사랑했고 지금도 서로 아끼는 존재지만, 앞으로의 방향은 다르다는 것. 이제는 커플로써 함께 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간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때론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 하던 것을 멈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운동을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 매일 마시던 음료수를 끊는 것이 다이어트에 훨씬 효과적인 것처럼, 단지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것만으로도 많은 걸 얻을 수 있다.


<꾸뻬 씨의 행복여행>의 정신과 전문의 헥터(사이먼 페그)는 보람 없는 삶에 염증을 느끼고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 세계 여행을 떠난다. 아프리카 여행 중 만난 여인에게 행복한 삶의 모습을 묻자, 그녀는 자신의 가족이 안전하게 학교에 갈 수 있는 삶이라고 대답한다. 우리에겐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지만 그녀에겐 간절히 바라는 이상적인 삶인 것이다.


중국, 티베트, 남아프리카, 영국을 망라하는 세계 여행 끝에 헥터가 깨닫게 된 것은 늘 그의 곁에 있던 클라라를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그녀가 자신의 행복이라는 것. 진정한 행복을 찾아서 전 세계를 돌아다녔지만, 그것은 내내 그의 곁에 있었다. 그동안 그에게 행복을 주지 않는 불필요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어 미처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보기 위해선 먼저 그 위에 쌓인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걷어내야 한다.



먼저, 비워내야 한다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저 관계가 오래됐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기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것. 이는 인간관계뿐 아니라 물건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우린 종종 아직 갖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오래된 물건들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정리를 했더니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되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고객들이 정리 레슨 후에 독립이나 전직을 해서 더욱 열심히 일하거나, 일에 대한 의식이 바뀌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좋아하는 일’을 의식하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나 생활 자체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물건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 선택의 역사를 정확히 보여준다. 정리는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는 자신에 대한 ‘재고 조사’다.

- 곤도 마리에 <정리의 힘>


새로운 인생을 위한 첫걸음으로 가장 좋은 것은 불필요한 물건을 정리하는 것이다. 정리 컨설팅 쇼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로 유명한 일본의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의 말처럼, 단순히 주변 환경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인생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영화 <100일 동안 100가지로 100퍼센트 행복 찾기>의 폴(플로리안 핏츠)과 토니(마티아스 슈바이그호퍼)는 술김에 '100일 동안 하루에 한 가지 물건만을 갖고 생활하기'라는 내기를 한다.


모든 것을 가진 풀소유에서 하루아침에 무소유가 돼버린 그들. 하루에 단 한 가지 물건씩만을 가질 수 있기에, 매일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필사적으로 고민한다.


초반에 두 사람은 이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러 속임수를 쓰기도 하지만, 100일이 지나 내기가 종료된 후엔 그럴 의무가 없어진 다음에도 자발적으로 비슷한 생활을 이어가며 행복을 느낀다. 늘 당연하게 여겨왔던 잡동사니가 없어지니 정말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옛날에는 가진 게 없어도 행복했잖아요.
우리는 다 가졌는데,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왜 행복하지 않은 거죠?

- <100일 동안 100가지로
100퍼센트 행복 찾기>



통계에 따르면 현대인은 평균 1만 가지의 물건을 소유하고 있고, 그중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20%에 불과하다고 한다. 소유한 물건이 너무 많으면 자신이 그 물건을 구입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릴 때가 많다.


어떤 물건들을 소유하고 있는지, 그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정확히 기억하기 힘들기 때문에 필요한 순간에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가끔은 내가 그것을 갖고 있는지 조차 확신이 없어 같은 물건을 다시 구입하기도 한다. 불필요한 물건을 정리해 소유한 물건의 개수를 줄이면, 어떤 물건이 필요한 순간에 그것을 찾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매일 받아들이는 정보 또한 마찬가지다. 현대인 한 명이 하루 동안 접하는 정보의 양이 20세기 초 한 사람이 평생 접한 정보량과 맞먹는다고 한다. 그중 우리에게 실제로 가치 있는 정보들은 얼마나 될까?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


컴퓨터에 너무 많은 파일을 저장하면 정보 처리 속도에 많은 시간이 걸려 성능이 저하된다. 이때 해결방법은 두 가지다. 메모리 카드를 추가해 용량을 늘리거나, 저장된 파일 용량을 줄이는 것. 매 순간 엄청난 양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뇌도 컴퓨터처럼 너무 많은 정보를 처리하다 보면 기억력과 판단력이 저하된다. 머릿속에 메모리 카드를 추가할 순 없으니, 남은 방법은 한 가지다. 저장된 정보를 줄이는 것.


이미 저장된 기억을 컴퓨터 파일 지우듯 삭제할 순 없기 때문에 앞으로 저장될 정보들을 잘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뇌에 어떤 정보들이 기억되고 어떤 정보를 지울 것인지 선택할 수 없다. 어떤 영상을 본 후에 그것이 기억할 가치가 없다고 해서 기억에서 지워버릴 순 없으니까.


신체 에너지의 25%를 사용하는 우리의 뇌에 필요 없는 정보를 저장시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 낭비다. 그러니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보고 듣는 것에도 신중해야 한다. 내게 노출되는 모든 정보를 하나하나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온라인 플랫폼은 내가 원하지도 않았던 정보들을 내 눈앞에 무분별하게 늘어놓는다.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플랫폼들이 업무와 직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예 끊어내는 것도 쉽지 않다.


자신의 SNS 팔로우 계정을 정기적으로 관리해 피드에 노출될 정보를 제한하고, OTT나 예능 프로그램 시청에 쓰는 시간을 스스로 한정해보자. 불필요한 정보들을 제한하려는 그런 작은 노력이 좋은 첫걸음이 될 것이다.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적이다. 내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가치 없는 콘텐츠에 자신을 지속적으로 노출시킨다면 정작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들에는 시간과 에너지를 쓸 수 없게 되어버린다.


이전의 어떤 세대보다도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선 더 주의해야 한다. 매 순간 우리에게 쏟아지는 막대한 양의 정보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수많은 물건들 중에 자신에게 정말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선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남을 위한 헤어짐, 채움을 위한 비움


위학일익(爲學日益) 위도일손(爲道日損)
: 배움의 목표는 매일 새로운 것을 채우는 것이고, 도의 목표는 매일 가진 것을 버리는 것이다.

- <도덕경> 48장


그 모든 걸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은 중요한 게 없다는 말과도 같고, 무언가를 버리는 것은 가진 것을 더 소중히 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매일 불필요한 것을 비워내고 그 자리를 정말 가치 있는 것으로 채우는 것. 어쩌면 이 한 문장이 지금 당신이 느끼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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