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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재 Jan 25. 2023

step 6. '전략적 빈틈'의 힘

러프하게 편집하기


글의 초고를 쓸 때엔 파도에 몸을 맡기듯 자연스럽게 써 내려가야 합니다. 처음부터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되면 이야기의 전체적인 리듬이 깨져버립니다. 글을 쓰는 손이 영감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충만했던 영감이 시들어버리기도 하죠. 글에 몰입이 된 상태에선 뇌가 달궈져 있는 그 온도를 유지하며 물 흐르듯 써 내려가야 합니다. 단어나 문장을 세세하게 손보는 것은 그다음 일입니다.



'러프하게' 편집하기


영상 편집 역시 처음엔 이렇게 대략적인 그림을 만드는 작업에서 시작해 점점 더 정교한 작업으로 나아갑니다. 처음엔 컷과 배열을 성글게 맞추며 전체적인 흐름에만 신경 써야 해요. 이 단계에선 각각의 프레임이 아닌 전체적인 플로우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대략적인 느낌을 보는 것이죠.


성글게 영상을 편집해 보면 간혹 처음에 잘 어울릴 거라 예상했던 음악이 어색하다거나, 생각했던 느낌이 잘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큼지막한 틀을 바로 잡으려면 이 단계에서 수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정교한 프레임 단위 편집, 그래픽 작업, 톤 보정, 피부 보정 등의 작업은 한 번 하게 되면 수정이 어렵기 때문에 그런 디테일한 작업이 들어가기 전에 대략적인 편집을 통해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가늠해 보는 것이죠.


이렇게 성글게 편집한 상태를 업계에선 '가편'이라고 부릅니다. 같은 의미로 '러프하게 한번 보여주세요'라고 하기도 하죠. 업계에선 이 '러프(rough)하게'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본래 의미는 '거칠게'라는 뜻이지만, 업계에서는 '대략적으로', '가볍게', '캐주얼하게'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모든 프로젝트에서 이 러프한 가편이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산이 큰 경우, 품이 많이 들어가는 그래픽 효과 등 정교한 작업이 들어가기 전 먼저 컨펌을 받아야 하는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대부분의 바이럴 영상은 예산이 그리 크지 않기도 하고 청사진처럼 이미 콘티를 컨펌받은 후 진행하기 때문에 가편 컨펌 과정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힘을 빼는 것의 힘


하지만 가편이 필요 없는 경우라고 해도 처음부터 모든 프레임을 완벽하게 편집하려고 하는 것은 시간낭비입니다. 모든 프레임을 빈틈없이 단단하게 편집해 놨는데 후에 모든 것을 엎으며 그동안 정교하게 작업했던 모든 것을 부숴야 할 수도 있어요. 이런 시간낭비를 줄이기 위해 먼저 러프하게 편집을 하며 대략적인 느낌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손으로 도자기를 빚을 때 처음부터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손보려고 하다간 흙이 굳어버리고 맙니다. 물을 뿌려가며 흙이 마르지 않게 작업한다고 하더라도, 어쨌거나 그런 작은 부분만을 보다간 전체적인 부분에 소홀해지기 때문에 그렇게 대세에 지장이 없는 부분은 일단 넘기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세세한 완벽함은 전체적인 틀이 완성되고 난 뒤 손봐도 늦지 않아요.


게다가 그런 것이 도자기의 퀄리티에 정작 큰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닙니다. 애초에 아무 흠 없는 완벽한 도자기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걸지도 몰라요. 그래서 대가들은 오히려 세세한 부분에 연연하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작업하는 경우가 많죠. 작은 디테일의 완벽함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우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처음에 힘을 빼고 작업하는 것은 방향을 올바로 설정하기 위함입니다. 숲 속에서 코앞의 나무만 보고 가다간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것처럼,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한 발자국 떨어져서 전체적인 그림을 보며 방향을 올바르게 설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힘을 빼고 전체적인 틀을 설정하는 초기 작업 과정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와 비슷한 예를 끝도 없이 들 수도 있습니다. 어느 분야에서나 통하는 방법이거든요.



전략적 빈틈


서핑을 할 때 적절한 파도가 왔을 때는 일단 파도에 올라타 물살에 온몸을 맡겨야 합니다. 이때 동작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 온몸을 뻣뻣하게 했다간 금세 고꾸라지고 맙니다. 거세고 무질서한 파도 위에서 균형을 잘 잡으려면 올바른 무게 중심 설정과 유연성이 중요합니다. 이 유연성은 '전략적 빈틈'의 핵심이자 목적입니다.


빈틈없이 단단하게 굳어진 것은 어느 한 부분만 건드려도 쉽게 쓰러지고 맙니다. 반대로 제주의 성글게 쌓아 올린 제주의 돌담은 보기엔 무척이나 불안해 보이지만 매섭기로 소문난 제주의 거센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바람이 통과할 수 있도록 구멍이 숭숭 뚫린 빈틈이 오히려 담을 오랜 시간 동안 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영상은 물론이고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보다 통제하지 못하는 변수들이 훨씬 많습니다. 이 변수들이 우리를 쉽게 무너뜨리지 않으려면 이것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를 통과해 지나갈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흘려보내야 합니다.


인생의 수많은 변수가 우리를 무너뜨리지 않고 가볍게 훑고 갈 수 있도록, 힘을 빼고 유연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행복의 열쇠일지도 모릅니다. 벽돌을 쌓아 올리고 시멘트를 발라 굳어진 마음이 아니라 제주의 돌담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마음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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