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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혁재 Feb 17. 2020

그때 떨어져서 다행이다

MBA 인턴쉽 합격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오토데스크(Autodesk)라는 기업에서 MBA 인턴쉽 최종 오퍼를 받았다. 2020년 여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지내게 될 것 같다. 오토데스크는 공대를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오토캐드(AutoCAD)라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기업이다. 오토캐드 말고도 다양한 분야의 크리에이터들이 새로운 것들을 디자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을 개발한다. 테슬라(Tesla) 자동차 디자인부터 맨해튼에 있는 One World Trade Center 빌딩 설계, 그리고 디즈니나 픽사의 3D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까지 오토데스크 소프트웨어가 사용된다. 이처럼 오토데스크는 높은 기술력으로 산업 전 분야에 영향을 끼치는 선도적인 제품을 만드는 회사다.


이전 글에서 밝혔듯이 면접은 꼭 잘 봐서 붙고 못 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이번에도 딱 그런 경험을 했다. 오토데스크와의 1차 면접은 내가 올해 가장 못 본 면접이었다. 질문의 포인트도 잘 못 잡고 횡설수설했다. 그런데도 면접 말미에 면접관은 내가 마음에 든다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테니 2차 면접을 기다리라고 말했다. 어지간히 못 봤는데 마음에 든다니 참. 원래 내 얼굴을 보기 전부터 내 이력이 마음에 들었다는 느낌이었다. 같은 동양인이다 보니 아무래도 케미가 잘 맞기도 했다. 이런 게 미국 회사들이 구인 과정에서 그렇게 강조하는 'fit'이다. 그냥 '뭔가 이 사람 우리 회사나 팀 문화와 잘 맞겠다'는 극히 주관적인 이 느낌으로 fit이 좋다고 말하고 이를 중요시 여긴다. 문제는 fit이 면접 연습으로 생기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지난 3-4개월 동안 대략 50개 회사에 MBA 인턴쉽 지원서를 넣었다. 면접은 10개 회사와 15회 정도 했다. 한국인으로서 미국 현지 취업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몸소 체험한 시간이었다. 특히 네트워킹을 강조하는 미국 구직 문화가 나와 맞지 않았다.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면서 힘들었던 게 아니라 그걸 안 하려고 피해 다니는 게 심적으로 피곤했다. 어차피 네트워킹을 강조하는 회사라면 그 문화가 나와 잘 맞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굳이 엄청 일하고 싶은 회사라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전화 돌리거나, 직접 만나서 몹시 관심 있는 척 대화하는 네트워킹은 일찌감치 접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이런저런 핑계로 필터를 하고 나니 지원서를 넣을 만한 회사도 별로 없었다. 최종 면접까지 갔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x)도 최종 불합격했다. 결국 2월 들어 오토데스크는 내 손에 남은 마지막 화살이었다. 다행히 그게 명중했다.


오토데스크는 네트워킹을 굳이 요구하지 않은 회사였다. 내가 합격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여보려고 링트인에서 MBA 출신 오토데스크 직원들을 찾아서 콜드 이메일을 3통 정도 보냈었는데, 아무도 답장을 주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보통 다른 회사 사람들은 콜드 콜이나 콜드 이메일을 잘 받아줄 뿐만 아니라, 궁금한 사항에 대해 적극적으로 답도 해주고 다른 직원들도 소개해줬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도 답을 주지 않는 회사라니(그렇다고 사람들이 불친절한 건 아니다). 그래서 더 내 스타일이다. 너무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하는 회사나 팀에 내가 들어간다면 능력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할 게 훤하다. MBA 채용에 적극적인 미국 회사들이 특히 이렇게 커뮤니케이션을 중요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다행히 오토데스크는 내 이력과 커뮤니케이션 외 능력을 높이 평가해줘서 운이 좋게도 네트워킹 없이 인턴 구직을 마칠 수 있었다.


내 MBA 여정의 챕터 1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다른 글에서 밝혔듯이 MBA는 취업 사관학교다. 원하는 회사 인턴쉽을 잡는 게 1차 목표다. 절반 정도의 학생들은 졸업 후에 인턴쉽을 했던 회사로 되돌아간다. 나머지 절반은 새로 full-time 구직을 한다.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인턴쉽을 했던 회사에서 full-time으로 전환 오퍼를 받지 못한 경우이거나, 인턴쉽 경력을 발판 삼아서 더 가고 싶었던 다른 회사에 지원하는 경우다. 인턴쉽 경험 자체가 챕터 2이고,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온 2학년이 챕터 3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챕터 3은 다시 시작하는 구직 과정일 수도 있고, 인턴쉽 때 번 돈과 full-time 오퍼에 사인하면서 받은 signing bonus로 열심히 여행을 다니면서 노는 꿈같은 시간일 수도 있다.


MBA 인턴쉽은 한국에서 생각하는 대졸 인턴쉽과는 많이 다르다. 일단 MBA 학생들이 보통 3-7년 경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턴이라고 하더라도 업무적 직급은 대리에서 과장 정도다. 따라서 수입 수준도 많이 차이가 나는데, 우리 학교 통계치만 보더라도 여름 인턴 평균 월급이 $8,000 이상이다. 요즘 환율로 9백만 원이 넘는 돈이다. 물론 미국 물가를 생각하면 1대 1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내가 한국에서 받던 대리 월급에 비하면 인턴 치고 상당한 금액이다. 여기에 보통 비행기표와 사이닝 보너스, 또는 생활 보조금을 얹어 주는 경우가 많다. 평일 오버타임은 1.5배, 주말 근무는 2배로 수당 계산도 칼 같이 해준다. 이것저것 다 포함하면 맨해튼 투자은행에서 인턴 할 경우 10-12주 기간 동안 총 $30,000 이상 받는 경우가 많다. 다만 그 기간 동안 잠은 별로 못 자는 게 치명적인 흠이다. 나처럼 테크 기업에서 인턴 하는 경우엔 더 적게 일하고 적게 번다.


만약 지난 1월 한국 컨설팅 인터뷰에 붙었더라면 어땠을까. 뉴욕에서 인터뷰를 했던 게 1월 4일이었고, 합격했었다고 가정하면 오퍼 최종 수락 기한이 2월 4일까지였다. 오토데스크에서 2월 14일 합격 연락을 주기 전까지 내 손엔 아무런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난 한국 컨설팅 인턴 오퍼를 수락했을 거다. MBA 인턴 오퍼는 한 번 수락하고 계약에 사인을 하면 번복하기 힘들다. 학교와 회사 측 신뢰 관계에 금이 갈 수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가만 두지 않는다. 만약 그때 붙어서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면 후회했을 게 분명하다. 미국 내 경력을 하나도 쌓지 못했을 것이고, 2학년 때 full-time 구직을 미국 쪽으로 하더라도 힘들었을 거다. 인턴도 붙기 어려운데 full-time은 오죽할까. 특히 미국 근무 경력이 전무하다면 말이다. 그때 떨어져서 참 다행이다.


― Ray Dalio, Principles: Life and Work


이런 논리는 오토데스크 합격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이곳과 사인하고 났더니 더 좋은 회사에 합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그런 일은 항상 일어난다. 그래서 어떤 게 최선이었는지는 전지적 시점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다. 난 MBA에 지원 시에도 Darden에 합격한 이후 다른 학교들 지원 프로세스를 완전히 접었다. 만약 개이치 않고 지원서를 계속 넣었다면 좀 더 랭킹이 높은 학교에 합격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난 일어나지 않은 가능성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지금 내 앞에 주어진 결과나 선택이 충분히 만족스럽다면 감사히 받아 들고 계속 걸어가면 된다. 어차피 갈림길은 계속 나온다. 떨어지면 씁쓸하고 붙으면 기쁘지만 이것도 하나의 갈림길에 불과하다. 좀 더 긴 시야가 필요하다. 어느 길로 가던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가고 있는지가 중요하니까.



커버 이미지: Photo by Edgar Chaparr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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