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살고 있는 나는 오늘까지 약 2개월째 하루 종일 집에 갇혀 생활 중이다. 어제부터 1 단계 경제 정상화 작업에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집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다. 산책하고, 마트에서 식료품을 사고, 온라인에서 주문한 음식을 픽업하는 게 전부다. 원래 집돌이라 풀어놔도 별로 돌아다니지 않는 나로서도 참 답답한 나날들이다.
불행 중 축복으로 딸아이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주어졌다. 원래의 상황이라면 아침 7시 반에 집을 나서서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각종 팀 과제를 한 뒤 오후 늦게나 집에 돌아와 아기를 봤을 것이다. 그런데 COVID-19 팬데믹 선언으로 학교 수업이 전면적으로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하루 24시간 아내, 딸아이와 붙어있게 된 것이다.
딸아이를 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부쩍 우리 부모님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의사인 내 아버지, 어머니는 내가 아기일 때 얼마나 바빴던가. 지금 내가 딸아이와 보내는 시간의 24 분의 1도 나와 우리 형을 보지 못하셨다. 그 당시 레지던트(전공의)는 정말 병원에 살아서 레지던트(거주자)였다. 주말은 말할 것도 없고 명절마저도 자주 집에 오지 못했다. 나와 형을 대신 키우신 할머니는 며칠 또는 몇 주에 한번 집에 들어오는 아빠 엄마에게 옷가지를 싸서 병원으로 가져다 주시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과로하고 살 수 있었을까 기가 막힌데, 패러다임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작년까지 내과 레지던트였던 내 형의 상황은 많이 달랐다. 요즘은 전공의 80시간 미만 근로 준수를 강제하는 법도 있고, 의사들도 옛날처럼 공부만 잘하던 책벌레들이 아니라 자기 권리를 큰 목소리로 주장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세상도 많이 바뀌었다. 바뀐 세상이라지만 형은 34세 나이에 군의관으로 지난달 입대했고, 앞으로 3년은 나라에 봉사해야 한다. 이것도 바뀔 날이 올까. 의사 되는 길, 참 멀고 험하다.
의사는 본인이 아니라 그 아내와 자식들만 덕 본다는 말이 있다. 일단 그 '아내'도 의사인 우리 집에 해당 없는 말이다. 그럼 자식들인 나와 형은 정말 덕 봤을까. 그렇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하다.
경제적으로만 보자면 의사 부모님을 둔 나로서는 너무나 큰 축복을 받았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 부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적은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부족하지 않은 게 축복이었다. 빈손으로 시작한 부모님은 의대 학비부터 빚으로 충당하셔야 했다.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을 거쳐 레지던트로 일할 때도 이 빚을 갚으셔야 했고, 그 당시 레지던트 월급이라고 해봤자 극히 박봉이었다. 또 두 분 모두 대학병원 교수 겸 의사로 일하셨기 때문에 교수 월급도 하는 일에 비해서 정말 작았다. 너무 공부와 일만 하고 사셨기 때문에 금융자산이나 부동산에 대한 지식도, 투자도, 관심도 없었다. 서울에 살지 않고 강원도 춘천에서 대부분 의사 생활을 하셨고 지금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수도권 집값 상승에 덕을 볼 일도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수년간 치매와 합병증으로 투병하실 때 치료비도 꽤나 들었고, 형이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한국에서 의학전문대학원을 다니는 걸 지원하는 데에도 지출이 컸을 것이다(나도 대학 다닐 때 철없이 용돈을 많이 타서 쓰긴 했지만,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졸업했으니 그 정도는 써도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결과적으로 30년 동안 맞벌이로 의사 일을 하신 우리 부모님의 모든 자산을 끌어들인다 해도 서울 주요 지역에 30평 아파트 하나 살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부모님은 항상 형과 내게 돈은 필요한 만큼 이상으로 벌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셨다. 나는 이게 치명적 실수라고 생각한다. 당신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계시더라도 자식에게 그렇게 교육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역시 가족 중 나 혼자만 의사가 아니고, 또 지금 비즈니스 스쿨(MBA)에 다니고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여의도에서 직장 다닐 때, 우리 팀 부장님이 나를 매일 금수저라고 놀리곤 하셨는데, 사실 한 번도 그 기대를 충족시켜 드리지 못했다. 부장님만 가진 독특한 금수저 감별 질문 리스트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언제 처음 나이키 운동화 신어봤어?' 같은 질문들이다. 중학교 때(2002년) 농구화 사면서 처음 신어봤다고 말씀드리자 못 미더워하시며 급히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셨다. 웃긴 건 그 부장님 연봉이 30년 경령의 우리 부모님보다 많았다는 사실인데, 아마 당연히 의사인 우리 부모님이 돈을 훨씬 많이 벌거라 생각하셨을 것이다. 사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잘못 알고 있다. 물론 나이키 신발을 신을 형편이 안 됐던 건 아니었지만, 워낙 부모님이 일만 하시고 신경을 못 써주시다 보니, 사실 나나 형은 나이키 신발이 뭔지도 잘 몰랐다. 심지어 중학교 사춘기에 접어들 때 까지도 부모님이 학회에서 받아오신 제약회사 로고가 박힌 공짜 옷들만 입고 살았다. 어릴 적 사진들을 보면 내 옷에 그렇게 '화이자'라고 써진 옷이 많다. 엄마의 전공 탓에 그 옷들에는 하트나 심장 모양이 자주 그려져 있었다. 뭐, 공짜 옷이 나쁜 건 아니지만 그만큼 내가 유복하거나 귀하게 금수저로 자란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도 나는 공짜 옷을 좋아하는데, 내가 입는 반팔티 절반은 학교나 세미나에서 받은 기념품들이다.
분명히 의사라는 직업은, 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 정도는 보장한다. 하지만 얻는 게 큰 만큼 포기하는 것도 많다. 지금 책상 앞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도 내가 어릴 적 아빠 엄마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추억들은 손에 꼽을 정도뿐이다. 내 생일날도 아빠 엄마는 밤 9시가 넘어야 집에 들어오셨다.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6살 생일날로 기억하는데, 할머니가 재우려고 하셨는데도 나는 엄마를 기다리느라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밤 10시가 넘어 엄마가 퇴근하셨다. 엄마가 집에 들어오는 소리를 들은 나는 달려 나가 엄마를 맞은 게 아니라, 침대에서 벽을 보고 엉엉 울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왜 우리 아빠 엄마는 내 생일날 조차 같이 저녁 한 번을 못 먹는단 말인가. 엉엉 울던 25년 전 그 서러운 마음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심장을 꾸욱 움켜쥐는 것만 같다. 사실 내 딸아이를 낳고 키우기 전까지는, '우리 엄마도 내가 그렇게 울어서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만 생각했다. 부모님이 사람을 살리는 귀한 일을 하시니까 내가 좀 손해 봐도 괜찮다고 스스로 믿도록 주문을 걸었다. 그렇게 믿어야 울지 않고 담담할 수 있었다. 일찍 어른스러운 척해야 했다.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비록 세상 구하는 일을 하더라도, 부모님 자식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 있다. 안 낳았으면 모르지만, 낳았으면 최소한 일정 수준 이상의 시간과 관심은 줘야 한다. 나는 그렇게 살 것이다. 이제 와서 부모님이 원망스러운 건 아니다. 다만, 왜 꼭 그렇게 일만 하고 살아야 했는지 이해가지 않을 뿐이다. 사랑하는 아들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내 부모님이 오히려 더 측은하게 느껴질 뿐이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 대도 그렇게 가족과의 시간보다는 일 위주로 사실 건지 물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