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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혁재 Jun 08. 2021

나도 너도 나도

선호의 모방

점심으로 불맛 제육볶음을 해 먹었다. 언제나 그렇듯 백종원 레시피는 실패가 없다. 정말 맛있었다. 미국 돼지고기는 돼지 비린내가 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도 Whole Foods에서 구매하면 대부분 괜찮다. 돼지고기 앞다리/뒷다리를 2파운드 어치 사다가 손질해 얼려놓았다. 아직 제육볶음 한 번, 김치찌개 한 번은 더 끓여먹을 수 있는 양이라 냉동고만큼이나 내 마음도 든든하다. 오늘 점심에는 김치찌개를 해 먹어야 하나.


점심을 맛있게 먹고 식탁을 정리하고 있는데 딸아이가 '이거, 이거!' 했다. 내 손엔 실리콘 재질의 연두색 냄비받침이 들려있었다. 형광 연두색 물체가 눈에 띄었나 보다. 나는 그것을 부메랑처럼 딸아이에게 던져주었다. 아이는 냄비받침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던져도 보고, 밟아도 보고, 접어도 보면서 이건 뭐하는 물건일까, 어떻게 가지고 노는 걸까 고민하는 듯했다. 냄비받침이 특별한 놀이 도구가 되긴 어렵다. 적어도 어른의 상상력으로는. 아마 가만히 두었다면 30초 이상 가지고 놀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아이에게 '아빠도, 아빠도!' 하면서 나도 한 번 가지고 놀고 싶다는 듯이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냄비받침을 건네 받은 나는 그것에 올라서서 발을 동동 굴렀다. '하하하하' 웃으면서. 그랬더니 몇 초 뒤 아이도 '리나도, 리나도!' 하면서 냄비받침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나는 바로 넘겨주지 않으면서 아이의 애간장을 태웠다. 그렇게 몇 번을 주고받고, 빼앗고 뺏기면서 한참(?)을 놀았다. 10분쯤 지났을까. 내가 지쳐서 냄비받침을 더 이상 원치 않는 모습을 보이자 이내 아이도 흥미를 잃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관심이 없는 물건은 17개월짜리 아이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라는. 아이는 부모의 행동, 말투, 억양 같은 것뿐 아니라 선호도 모방한다 라는. 선호도 모방하다니 이런 귀여운 따라쟁이 같으니라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아이가 좋아할 것이고 내가 싫어하는 일들을 아이가 싫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유전의 영향도 섞여있을 터라 아이의 모든 기호가 부모 행동 탓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부모의 일거수일투족은 결정적이다.


어른이라고 별반 다를까. 자라나면서 우리는 부모라는 사람 둘로부터 독립했을 뿐이다. 그 두 사람 말고도 우리 주변에서 우리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존재들은 널렸다. 요즘은 특히 미디어의 영향력이 극대화된 시대다. 사람들이 내게 끼치는 영향이라는 것들도 결국 미디어들이 한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아이가 부모를 모방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모방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 생각도, 선호도, 행동도, 말투도 어떤 개인들 또는 미디어가 가공한 가상의 캐릭터들의 재현일 뿐이다.


이런 생각의 줄기를 끝까지 잡고 늘어지면 우리의 자유의지를 의심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거기까지 가고 싶진 않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누구를 모방할 것인지'를 결정할 자유의지는 가지고 살고 있다고 믿고 싶다. 가령 우리에게 사지선다형 선택지가 주어졌다면, 그 선택지 자체를 바꿀 힘은 비록 없더라도, 그중에서 몇 번을 고를 것인지는 심사숙고해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야만 적어도 우리가 선호하는 사람, 생각, 사상, 물질 등이 우리가 진정 선호하고 싶어서 선호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안타깝게도 아이는 부모를 고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방의 대상을 제한적이나마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 이게 어른과 아이를 가르는 하나의 차이점이 아닐까? 에이, 아닌가 보다. 그렇다고 하기엔 이 세상에 어른이 너무 없잖아.



커버 이미지: Photo by George Pagan II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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