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의 산티아고>이야기
인기 코미디언 하페는 결국 무대에서 쓰러 집니다. 잠시 쉬라는 내면의 소리를 무시한 결과죠 그는 의사로부터 스트레스 과다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경고를 듣습니다. 줄리아 폰 하인츠 감독의 2016년 작품, <나의 산티아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페는 쓰러지고 나서야 무대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는 791Km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산티아고 출발지인 카미노 기차역에는 이런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진정 누군지 아십니까?" 하페는 혼잣말을 합니다. "아니 '전혀' 몰라."
사람들은 답을 찾아 이곳에 오지만 그는 질문부터 찾아야 했습니다. 뭘 물어야 하는지도 몰랐으니까요. 끝없이 길을 걷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말할 사람도 없습니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사실 내 순례는 매일 새로 시작된다. 긴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작은 여행을 이어 나간다. 이 길을 끝까지 가면 내 인생은 달라질까? 난 여전히 너무 많이 기대하나 보다. 어쨌건 길에서 만나는 건 오직 나 자신뿐이다. <하페>
사람들은 속죄하려고 순례한다지만 내가 보기엔 다들 죄 지으러 순례하는 것 같아..... 다들 자기 목표가 뭔질 모르니까... 어떤 목표를 찾느냐가 우리 목표인 거잖아요. <레나>
일상을 벗어난 곳에서 인간은 가면을 벗게 됩니다. 인간의 속성이 여과없이 드러나고 움직이는 것이 순례길이기도 합니다. 신에 대한, 혹은 존재에 대한 물음을 안고 출발한 길이지만 그만큼 절실한 것이 먹는 것, 자는 것, 걷는 것, 빨래, 섹스였습니다. 그런 속에서 각자는 목표를 찾아 갑니다.
깨달음의 새벽 전 깊은 어둠을 통과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반드시 각자의 밤을 걸어가야 한다. 기왕 걸을 거라면 자발적으로 걷는 게 더 좋겠지. <하페>
왜 사람들은 이 길이 맞는 길이라고 확신에 차 있을까? 지치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풀 죽은 채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걸어간다. 고통은 행복을 여는 열쇠일까?
침묵은 쉽다. 하지만 생각을 침묵시키기는 불가능하다. 잡념이 계속 머릿속에 밀려든다.
이 길은 무한한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이 길은 하나가 아니라 수천 개가 있다. 허나 누구든 질문은 같다. " 나는 누구인가?"
산티아고길을 걸으며 누구나 한 번씩은 밑바닥까지 흔들립니다. 그러나 혼자 걷지 않으면 길은 비밀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주인공 하페는 길 위에서 답을 얻었습니다. 하페만 알 수 있고 하페에게만 의미가 있는 답입니다.
<스페인 하숙>이라는 TV 예능이 있었습니다. 차승원 유해진이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객을 맞이했죠. 발이 짓무르고 무릎이 아프고 먹은 것이 시원찮은 한국 사람과 외국인들이 기웃거리며 들어왔습니다.
한국 순례자1이 식탁에서 말했습니다.
순례길에서는... 걷고 밥 먹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한 사람인데... 한국에선 풍족하고 좋은 데서 살면서... 누구 잘되는 사람 보는 것도 힘들고 매일매일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았는데 여기서 내 두 발로 걷고 숨 쉬고... 숙소 도착해서 빨래만 해도 행복하잖아요.
한국 순례자2는 말합니다.
가진 걸 놓으면 할 수 있어. 그걸 놓는 걸 못해서 그런 거지. 저는 가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가진 게 많았고, 갖고 있다고 한 것들은 내 것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너무 힘들었어요.
매일 40km를 걸어온 막심의 말입니다.
긴 거리를 걸을수록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 같아요.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게 제일 좋아요. 다 잊어버리고 그냥 걷는 거죠.
자기가 누구인지는 돌아본 만큼 보입니다. 안보려고 하니까 안보였던거죠. 하페처럼 일상의 체바퀴에서 내리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매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집과 일상을 떠난다는 것은 광야에 선 자신을 정직하게 보고싶은 열망입니다.
명상을 하며 눈을 감는 것도 같습니다. 일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익숙함으로부터 떠나면 안보이던 것이 보입니다. 한국에서는 몰랐던 것을 순례길에서 알게 되듯이, 눈뜨고 돌아다닐 때는 안보이던 것이 알아지는 것입니다.
가고 가고 가다 보면 길이 이어지고, 길 아닌 길을 가다 보면 되돌아오기도 합니다. 가다 보면 인생에 대해, 자신에 대해 처음으로 느껴지고 알아지기도 합니다. 설익은 시기에는 선무당 사람 잡듯이 멋대로 삶을 가늠하고 사람을 심판하며, 남의 가슴에 못도 박고 실수도 합니다. 또 가다 보면 후회도 하고 포기도 하고 다시 일어서기도 합니다. 빠른 방법을 기웃거리며 얍삽하게 택시도 타고 버스도 타고 그러면서 이러면 안된다는 것도 배웁니다. 가다 보면 미친놈도 만나지만 그를 통해 배우게 되고, 그지없는 길동무도 있어 다시 걸을 힘도 얻게 됩니다. 발도 까지고 무릎도 아플 때가 있지만 그냥 걷는것, 나에게 집중하는것, 그리고 나를 이해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순례길인 동시에 인생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