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태풍이 북상하고 있다. 장맛비는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아침까지만 해도 맴맴 거리던 매미들은 어디서 비를 피하고 있을까. 거친 빗방울 소리에 그들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졌다. 이렇게 가끔 기억나는 누군가가 있다. 매일 목청껏 울어 재껴도 관심조차 없던 매미의 안부가 갑자기 궁금해지는 것처럼. 나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어떤 존재로 살고 있을까. 가끔씩 꺼내보고 싶은, 그리고 생각하면 기분 좋아지는 그런 존재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그래도 나를 기억하면 미소 짓는 사람 한 둘은 있겠지라는 생각을 해보며, 그들은 누구일까 기분좋은 상상을 해본다.
그녀와 처음 소개팅 후, 집으로 돌아와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고, 용기 없던 나는 그냥 그렇게 그녀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녀에게 연락이 왔고, 나에게 안부를 물어봤다. 그녀에게서 내가 기억났음에 감사했고, 그 이유 또한 궁금해졌지만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아니면 내가 다양하고 수많은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어장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겠지만, 중요치 않았다. 그렇게 매력적인 그녀 주변에 남자 하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적 없었으니까. 그녀가 나를 기억하게 된 이유가 외적 동기든, 내적 동기든 상관없이 내가 그 어장에서 가장 매력적인 물고기가 돼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오늘은 그녀를 세 번째 만나는 날이다. 그녀가 생각하는 나의 호감도에 대한 예상 그래프를 그려봤다. 비록 첫날은 미미했지만, 둘째 날은 우상향 곡선을 그렸으며, 오늘만큼은 제곱의 성질을 갖겠다는 마음으로 전투력을 끌어 올렸다. 오전부터 그녀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오늘 오후에 먹고 싶은 메뉴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며칠 전 그녀에게 예쁘시다고 말했던 나의 작은 고백이 통한 건지, 그녀에게 보낸 카톡 메시지는 1에서 0으로의 전환율이 높아졌고, 돌아오는 대답에도 나에 대한 관심이 약간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편식 없이 먹성이 좋은 편이라, 메뉴를 정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지만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먹고 싶은 메뉴가 너무 많은 것도 문제가 되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음식을 먹을 기세였다. 그래도 그중에서 최대한 효용가치가 높은 메뉴를 선택하는데 집중을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다 작전이 떠올랐다. 근교에 있는 식당으로 떠난다면, 그녀는 내 옆자리에 앉아 분위기 좋은 음악을 들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할 수 있고, 둘만의 밀폐된 공간이 주는 떨림은 친밀감 상승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리고 수요미식회가 유행했던 시기라, 근교의 유명한 맛집에 데려가 주겠다는 명분도 설 수 있는 그런 전략이었다. 네이버 녹색창에 서울 근교 맛집을 검색했다. 최근에 백숙 맛집으로 수요미식회에 방영된 가평에 위치한 맛집이 검색됐다. 오두막 형식의 독채로 이뤄진 공간에서 둘만이 오붓하게 튼실한 토종닭의 뒷다리를 발라줄 수 있는 장소였다. 바로 전화를 걸어 아슬아슬하게 예약에 성공을 했고, 그녀에게 오늘은 나만 믿으면 된다며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식사 후 돌아오는 길에 자연스럽게 들릴 수 있는 남한강이 보이는 분위기 좋은 카페를 검색했다. 적당한 장소를 섭외했고, 나의 계획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녀의 집 앞에 도착을 했다. 아직 약속시간까지 10분이 남았지만 도착했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너무 떨려서 그런지 화장실이 가고 싶었고, 가볍게 볼일을 마치고 차로 돌아오는 길 근처 스타벅스에 들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그녀의 아메리카노를 차에 있는 컵홀더에 꽂는 순간, 내가 그녀를 위해 이런 작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행복했다. 커피를 좋아하는 그녀가 내가 준비한 커피를 마실 상상을 하니, 새삼 행복한 그런 기분. 그녀에게 도착했다는 연락을 했고, 저 멀리 그녀가 보였다. 순간 태티서의 트윙클 가사가 생각났고, “숨겨도 트윙클 어쩌나, 눈에 확 띄잖아”는 가사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그녀는 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