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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뜐뜐 Aug 22. 2021

소개팅_04

네 번째 이야기

오랜만에 버스를 탔다. 사무실이 집에서 멀지 않아, 보통 걸어 다니거나 자차를 이용했다. 초, 중, 고등학교를 집 근처에서 다녔기에 버스를 타고 통학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운전이 나의 생활이 되어 버렸다. 나에게 버스란 수학여행 또는 어딘가 단체로 이동할 때 말고는 이용할 수 없던 특별한 이동수단이었다. 홀로 버스 창가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꼽고 흘러가는 창밖을 흘겨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운전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호사스러운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달려, 이제 곧 신사역에 도착한다는 안내 멘트가 흘러 나왔다. 내리는 출구에도 버스카드를 찍는 단말기가 있었다. 분명 탈 때 찍었던 것 같은데, 사람들이 내리면서 하나 둘 다시 찍고 내리기 시작했다. 이유를 몰랐지만 나도 같이 찍으면서 내렸다. 두 번 요금이 부과된 건가 의아했지만, 일단 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와 약속했던 시간까지 십여분 밖에 남지 않았다.




구글맵의 도움을 받아, 레스토랑 입구에 무사히 도착을 했다. 그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레스토랑 앞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소개팅 첫날 그녀를 역 앞에서 만나 목적지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좋지는 않았다. 날씨는 더운데 떨리고 긴장되고 어지럽고 당황스럽고 등 많은 이유들이 내 겨드랑이를 홍수 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레스토랑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나 자신이 대견했다. 그리고 오는 길에 테라스가 있고 분위기가 괜찮아 보이는 맥주집 몇 군데를 찜해 놨다. 밤 날씨가 좋았던 계절이라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시다 보면 나에게 빠지지 않을까라는 그런 망상을 가지며.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쪽 방향으로 유도해야겠다는 머리를 굴리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이번에도 그녀는 15분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봤다. 가로수길 온 김에 친한 언니네 가게에서 물건을 교환하고 가는 중이라 조금 늦었다며 미안하다고 한다. 예쁘니까 너그럽게 용서됐다. 예쁘면 늦을 수 있고, 뭐 그럴 수 있지 않은가. 오른손에 들려있던 쇼핑백에는 준비해온 책과 노세범 파우더가 사이좋게 담겨있었다. 만나자마자 줘야 하나, 아니면 애피타이저를 먹다가 줘야 하나, 아니면 밥 다 먹고 줘야 하나.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순간, 멀리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고 여전히 그날도 그녀는 빛이 났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레스토랑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예전에 와본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집은 이게 맛있다며 추천해준 메뉴를 나도 모르게 나도 좋아하는 메뉴라며 자연스럽게 주문을 했다. 사실 먹어본 적 없는 메뉴였다. 첫 애피타이저가 나오기까지의 공백은 나에게 중력보다 크게 다가왔다. 다행히 나에게는 조그마한 쇼핑백이 준비되어 있었고, 주섬주섬 책을 꺼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데, 그녀가 라면을 좋아한다 했던 기억이 있어서 오전에 우연히 서점에 들른 김에 생각나서 사게 되었다고. 나는 서점에 종종 가는 편이라는 어필과 함께. 뭐, 서점에 일부러 갔든 우연히 갔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책을 보고 그녀는 자기도 좋아하던 작가이고, 읽어보고 싶었는데 고맙다며 답을 했다. 생각보다 반응이 뜨뜻미지근하자, 재빨리 준비한 두 번째 무기를 꺼냈다. 오다가 그녀가 생각나서 샀다며, 너는 참 예뻐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노세범 파우더를 건네줬다. 그녀는 적혀있는 문구를 보자마자 꺄르르했고, 나의 작전은 통한 듯했다.


너는 참 예쁘다는 문구 덕분이었을까. 대화는 한결 매끄러워졌고, 그녀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생각해보면 첫날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내 마음을 내심 고백한 것 같아서 뿌듯하기도, 쑥스럽기도 했다. 그사이 메인 메뉴가 나왔고, 정말 마른 체격에 저렇게 잘 먹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며칠 굶다가 나온 사람은 아니겠지라며 속으로 생각하다가, 만약 내가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밥값은 아끼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커피나 맥주 한잔하자는 나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준비한 루트로 그녀를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아까 미리 봐 둔 맥주집으로 향했다. 우연히 발견한 척, 여기 어떠냐고 물어봤고 그녀의 반응도 나쁘지는 않았다. 모퉁이 테라스 좌석에 앉아 이름 모를 맥주 두병을 시켰다. 날씨는 선선했고 불어오는 바람은 말랑말랑한 나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머릿결도 흔들렸고, 바람을 타고 코끝에 스치는 그녀의 향수 냄새도 나를 또 한 번 흔들리게 만들었다. 마음이 터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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