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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뜐뜐 Aug 21. 2021

소개팅_03

세 번째 이야기

평소 아침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특별한 일정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그냥 걷고 싶었던 걸까. 사무실까지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익숙한 골목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 다녔던 초등학교를 지나가다 문득 생각이 났다. 어릴 때부터 나는 거절받기를 싫어했다. 자존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던 것 같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약했던 마음은 쉽게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는 누군가에게 고백을 해본 적이 없었다. 마음을 숨기고 상대의 눈치를 보다, 이내 혼자 결론짓던 그런 기억이 난다. 지금 돌아보면 어릴 때 보다 몇 가지는 변했고, 지금도 몇 가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소심한 남자아이는 마음을 숨긴 채 살다 보니, 시간이 지나 어느덧 어른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에게 답이 오지 않았다. 카톡 창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와이파이 문제인가 싶어 핸드폰을 껐다 켜보기도 하고, 블루투스 모드를 껐다 켰다 반복하다 기계적인 문제가 아닌,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명 오고 가던 대화에는 껄끄러운 가시가 없이 매끄러웠는데,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다 내린 결론은, 역시 외모였다. 속으로 이미 알고 있었지만 부정하고 싶었던 걸까. 거울 속 나 자신이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질척거려 볼까 고민도 했지만, 외모를 커버할 만큼 자신감이 없었기에 그냥 그렇게 마음속에서 그녀를 놓아주었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그런 오래된 통념은 나에게 통하지 않았다. 일단 상처 받을 나 자신이 무서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카톡이 왔다.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는 너스레를 떨며 나에게 안부를 묻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그녀가 나의 안부를 궁금해한다니. 그녀의 갑작스러운 카톡에 무슨 말을 답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일단 만나고 보자는 생각뿐. 다짜고짜 언제 또 보냐며 약속 날짜를 잡았다. 그녀는 흔쾌히 알겠다며 약속했고, 나의 입꼬리는 관자놀이를 향해 있었다. 간지러운 마음을 달래 보려 눈을 감고 크게 호흡을 해봤지만 소용은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본 감정, 설레임이었다.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그녀를 다시 만나는 날이다.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는 적당한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저녁 식사 후 자연스럽게 맥주 한잔 할 수 있을 법한 코스로 나름 머리를 써봤다. 물론 그녀가 저녁 먹고 맥주까지 마셔줄지는 모르겠지만, 행복 회로를 일단 가동시켰다. 그리고 옷장에 있는 모든 옷을 침대에 꺼냈다. 그래 봤자 몇 개 없어서 큰 고민은 되지 않았다. 적당한 셔츠와 청바지에 잘 뿌리지도 않는 오래된 향수를 입히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를 만나러 가려던 길, 무언가가 허전했다. 한번 까였던 기억이 있는터라 이번만큼은 까이지 않아야겠다는 그런 굳은 의지랄까. 일단 나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받았을 때 부담스럽지도 않고, 내가 그녀를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선물. 바로 책이었다. 디지털 세상에서도 아직 아날로그적 감성이 나에게는 존재한다는 어필이라고 할까. 일단 서점으로 향했다. 베스트셀러들 사이에서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라는 제목이 눈길을 잡았다. 그렇다. 그녀는 나에게 라면을 좋아한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김훈 작가의 책이라니. 고민 없이 책을 짊어지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근처 이니스프리 매장에 들렸다. 매번 사용하는 왁스를 집다가 문득 핑크색 노세범 파우더 리미티드 에디션을 봤다. “너는 참 예뻐”라는 문구가 적힌 디자인. 내 마음이 바로 거기, 적혀 있었다. 어디에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민 없이 노세범 파우더도 결제했다.


평소에 잘 타지 않던 버스를 타고, 신사역에 하차를 하였다. 그녀와 맥주를 한잔 하겠다는 간곡한 의지랄까. 맥주 한잔 하려고 차를 놓고 왔다는 그런 멘트라도 날려 , 그녀와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소개팅을 한번 해본지라 지하철 출구에서 어슬렁 걸리고 있는 남녀들은 모두 소개팅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들도 많이 떨리겠지라며 혼자 중얼거리다 보니 어느덧 약속한 레스토랑 입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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