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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뜐뜐 Aug 29. 2021

소개팅_08

소풍 가기 전 날

누구나 간직하는 순간이 있다. 소풍 가기 전날, 설레는 마음에 잠을 설쳤던 그 마음. 다음날 입고 갈 옷과 점심에 먹을 도시락도 완벽하게 준비가 되었지만, 이유 없이 떨려오는 그 마음. 익숙한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떠나는 여행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급식이 아닌 도시락을 먹어서 그랬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유가 어쨌든, 평소에 관심이 있던 이성 친구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정말 최선을 다해 입고 나갈 옷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SNS가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평소 사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 줄 수도, 볼 수도 없는 그런 환경이었다. 요즘 TV에 유행하는 데이트 프로그램에서 남, 녀 출연진들이 며칠 동안 함께 생활하다가, 어느 시점이 되어 본인들의 직업과 나이를 공개하는 그런 순간이라고 할까. 그 사람의 프로필이 기대했던 기대치와 부합하는 상황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본인을 세상에 공개할 때의 떨림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학창 시절 당시 모두의 조건은 동일했고, 서로에게 가장 궁금한 건 오직 외적 취향이었다. 나의 존재를 처음으로 드러낼 수 있는 사복은 데이트 프로그램 출연진의 프로필 공개만큼 강력한 존재였다.


그녀를 세 번째 만나기로 약속한 전 날, 나는 사춘기 소년 때와 같은 마음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이 먹고 주책이었지만, 내 마음을 내가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근처 백화점에 들러 입고 나갈 옷과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향수도 준비를 했고, 미용실에서 지저분한 머리도 정리를 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셀프 세차장에 들러 차 구석구석 쌓인 묵은 때도 씻겨내고 광택도 냈다. 세련된 고가의 방향제로 교체를 했고, 그녀와 차에서 들을 음악도 신중하게 선곡하여 멜론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즐겨 듣던 음악들과 평소에는 듣지도 않는 트렌디한 음악도 조금 섞어, 내 취향을 한껏 포장하였다. 모든 준비는 끝났고, 이제 그녀가 나를 향해 오고 있다.




그녀와 음악을 들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가평 백숙집에 도착을 했다. 소문대로 주차장에 차는 가득했고, 주차요원의 안내에 따라 좁은 계곡가에 주차를 했다. 후진을 할 때 후방 카메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시트를 감싸 볼까 하는 그런 주책맞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꾹 참았다. 그녀와 함께 음식점 입구로 걸어갔다. 음식점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커플들 속에서, 그녀와 나도 커플처럼 보일까 문득 궁금했다. 제 3자의 시선으로 그녀와 나를 커플로 생각할 수 도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다. 안내방송에서 내 이름이 불려졌고, 안내에 따라 별채로 된 방갈로에 들어갔다. 모든 음식은 이미 세팅이 되어 있었고, 뽀얀 토종닭은 육수에 담겨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계곡 물소리와 동글뱅이 모기향 냄새가 주는 낯설음은, 그녀와 내가 먼 곳으로 여행을 왔다는 착각을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가스버너를 켜고 내 마음과 백숙이 보글보글 끓어갈 때쯤, 닭다리를 찢어 그녀에게 건네줬다. 그녀는 뻑뻑 살을 못 먹는다고 한다. 사실 나도 뻑뻑 살을 싫어하지만, 그녀에게 나는 뻑뻑 살만 좋아한다고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닭다리 두 개를 건네주고 날개와 허벅지 마저 건네주었다. 나는 토종닭의 넓은 가슴살로 보디빌딩 식단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고작 배나 채우자고 여기에 온 게 아니니까. 분위기도 좋고 정말 맛도 있다며 웃으면서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니, 백숙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사실 그녀가 먹은 부위가 부드럽고 맛있긴 하겠더라. 나는 맛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날의 분위기 하나만큼은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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