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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뜐뜐 Sep 17. 2021

소개팅_10

김희선

배우 김희선 씨가 TV 프로그램에 나와 이런 말을 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렴풋 기억하기로는 "백화점에 신발을 사러 가는데 맨발로 갈 수는 없잖아요. 헌 신발이라도 신고 가야 새 신발을 살 수 있잖아요"라고. 당시 나는 너무 어렸고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저 양다리에 대한 합리화를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라며 감탄했던 기억만 남았을 뿐. 그리고 나는 비참한 헌 신발짝이 되지 말아야겠다, 비록 맨발 일지언정 헌신발을 끌고 백화점에 가지 않겠다는 그런 순수한 다짐만 가득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인생 선배가 했던 말이 그렇게 틀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잘잘못을 떠나 본인이 처한 연애 상황에 따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날 때면 습관적으로 그 사람의 발을 먼저 보게 되었다. 맨발인지, 아니면 헌 신발을 질질 끌고 나를 만나러 왔는지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랄까. 물론 그녀를 만날 때도 자연스럽게 관찰하게 되었다. 남자 친구가 없으니까 소개팅을 나왔을 것이라는 순수한 마음은 버려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도 내심 그녀가 맨발이길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대는 했지만, 자꾸만 그녀에게 다른 신발들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헌 신발이 아닌 새 신발도 여럿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참 복잡했다.




이렇게 떨린 적이 있었을까. 마음이 너무 떨리다 못해 실제로 몸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간 진동벨까지 울려 정신이 혼미해졌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등 뒤에서 혹시나 그녀가 나를 보고 있을까 봐 걸음걸이까지 신경 쓰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카운터에 도착해서 진동벨을 반납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과 조그만 케이크를 픽업해서 자리로 돌아왔다. 테이블과 의자에 맺혀있던 이슬을 닦아냈지만 여전히 축축함은 남아있었다. 한강의 습도와 초여름의 일교차가 만나 야외에는 많은 이슬이 맺혔지만, 이런 꿉꿉함을 감수하더라도 테라스 자리에 앉은 이유가 여럿 있었다. 한강이 주는 여유로움을 느끼며 그녀와 커피를 마시는 것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야 혹시 내 고백이 까이더라도 듣는 이가 없을 테니. 그리고 어두운 밤하늘 덕분에 당황한 내 얼굴도 조금은 감춰질 것 같았기에 나름 전략적인 이유도 포함되었다. 지금 기억해 보면 당시 그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고백하는 타이밍을 잡으려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아무 말 대잔치를 했던 것 같다. 그냥 그렇게 허허 실실 아무 말이나 하면서 웃다 보니 어느새 커피는 바닥을 보였고, 카페 영업 종료시간이 다가왔다. 어쩌지.


고백하는 게 이렇게 어려웠던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카페를 나왔다. 그녀를 다시 집까지 데려다주러 차에 탔다. 오늘은 타이밍이 아니었고 다음번에 그녀를 만나면 고백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고백하지도 못할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하루 종일 내적 갈등을 하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것을. 내가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던 결과였다. 그래도 이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어찌저찌 차는 출발했고, 문득 그녀의 노래 플레이리스트가 궁금해졌다. 그녀는 흔쾌히 아이폰을 블루투스 페어링을 했고, 그녀의 플레이리스트가 차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신나는 댄스나 클럽 음악을 좋아할 것 같은 그녀의 외모와는 달리, 오래되고 잔잔한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영화 비긴 어게인에서 마크 러팔로가 키이나 나이틀리에게 그녀의 플레이리스트를 듣고 싶다고 하니, 플레이리스트를 보여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부끄럽다고 말했던 장면이 기억난다.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이 궁금했고, 그녀의 플레이리스트를 통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약간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남자 이름으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내 전화가 아니라, 그녀의 아이폰이 내 차에 연결이 되어 있어서 센터패시아 디스플레이에 그 남자의 이름이 뜨게 되었고 그 사실을 같이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왜 이 시간에 전화를 하지라며 흐릿한 혼잣말을 중얼거렸고 통화 거절 버튼을 급하게 눌렀다. 그렇게 한고비 넘기나 싶었는데, 그 사람에게 다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그녀는 다시 거절 버튼을 눌렀고, 차에는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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