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을 읽는 100가지 방법

16.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가

by 제이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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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소설 『설득』을 설득의 관점에서 읽어보려고 한다. 이 소설은 우리가 타인의 말에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데, 타인의 조언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등장 인물들에게 말의 힘을 가장 잘 발휘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레이디 러셀이다. 엘리엇 경이 아내를 사별하고, 세 딸(엘리자베스, 앤, 메리)을 키우는 과정에서 레이디 러셀의 도움을 받는데, 그녀는 이 가정에 매우 큰 영향력을 주는 인물로 나온다. 어퍼크로스(메리는 어퍼크로스의 찰스와 결혼함)에 사는 메리의 시누이인 헨리에타도 레이디 러셀은 설득을 잘 하는 인물로 인정하는 발언을 종종 한다.


"레이디 러셀께서 어퍼크로스에 살면서 셜리 박사와 가까이 지내시면 정말 좋을 텐데요. 모두들 레이디 러셀만큼 다른 사람을 잘 설득하는 분도 없다고 하거든요! 그분이 설득하시면 누구든 무슨 일이라도 할 거에요!(155)


레이디 러셀은 무엇보다 앤의 성장 과정에서 어머니를 대신하여 이성적 판단이나 행동 등 모든 면에 있어서 도움을 준다. 레이디 러셀은 앤 엘리엇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권위자로서, 20대 초반 젊은 시절 앤이 웬트워스와의 약혼을 파기하도록 설득하기도 한다. 웬트워스 대령의 청혼에 아버지 엘리엇 경과, 레이디 러셀의 반대에 부딪혀 앤은 결국 포기하고 만다.


그 같은 판단에 입각한 레이디 러셀의 반대는 앤이 저항하기에는 벅찬 것이었다. 아직 어리고 온순한 성격이긴 해도 아버지의 반대에 저항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언니가 친절한 말이나 시선을 단 한번도 주지 않는 것도 거의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디 러셀은 앤이 항상 사랑하고 의지하던 어른이었다. 그런 분이 그렇게 꾸준하고 자상하게 충고를 거듭하자 결국은 설득당하고 말았다. 자신의 약혼은 실수였고 부적절한 일이었으며 성공의 가능성도 별로 없고 그럴 가치도 없는 것이라 믿게 되었다. 하지만 앤이 파혼을 결정한 것은 단순히 자신이 입을 피해만을 염려해서는 아니었다. 자기 자신보다 그를 위해 파혼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그를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를 위해서 자신이 신중해야 한다고, 자신의 소망을 포기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별-마지막 이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었고 마음의 위로를 받기도 했다. (44)


과연 레이디 러셀의 설득은 앤의 삶에 도움이 되었던 것일까? 레이디 러셀의 설득은 결과적으로 앤의 불행과 후회를 초래하게 만들었으며 차츰 앤의 생각도 변화된다. 앤은 내면적 성장을 통해 레이디 러셀의 설득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힘을 기른다. 이 부분은 다른 사람의 감정과 정서를 고려하지 않고 이성에만 기초한 설득은 힘을 잃고 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설득은 말로만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웬트워스 대령이다. 소설 전반에 걸쳐 말보다는 일관성, 헌신, 묵묵한 신념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직접 드러내기 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려 한다. 앤, 웬트워스, 루이자 일행이 라임의 코브 방파제를 산책할 때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루이자 머스그로브은 방파제에서 뛰어내리는 무모한 행동을 한다. 이때 루이자는 뛰어내리다가 미끄러져서 머리를 다쳐 기절한다. 웬트워스 대령은 즉각 루이자를 돌보며 당황한 가족들을 진정시키고 상황을 수습하려 한다. 루이자가 다친 데는 그녀의 강한 성격을 부추기고 인정해준 자신의 영향도 있다고 생각하서 웬트워스 대령은 강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한 조치를 지시하는 등, 책임과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도 앤은 이 모습에서 큰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웬트워스가 보여준 것은 많은 말과 조언의 설득이 아니라, 신념과 책임감에 따른 행동을 보여주는 말없는 설득이라고 할 수 있다.


루이자가 떨어졌을 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한 것은 앤도 마찬가지였다. 웬트워스 대령이 앤의 조언을 듣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주위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위로하면서 침착하게 일 처리를 하는 그녀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에 그녀가 하는 어떤 조언도 이미 받아들일 맘이 되어 있다. 그녀의 이성적이고 성숙한 모습에서 웬트워스 대령은 충분히 설득당하고도 남았던 것이다.


앤은 기운을 차리고 열과 성을 다해 직관이 지시하는 대로 헨리에타를 돌보는 동시에, 틈틈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의를 기울였다. 메리를 진정시켰고, 찰스의 기운을 북돋웠으며, 웬트워스 대령을 위로했다.

"앤, 앤." 찰스가 외쳤다. "이에 어떻게 해야 되지요? 대관절 어떻게 하면 좋지요?"

웬트워스 대령의 눈길이 그녀를 향했다.

"여관으로 루이자를 데려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맞아요, 조심해서 여관으로 데려가도록 하는 게 좋겠어요."

"맞습니다, 맞아요! 여관으로 갑시다." 웬트워스 대령이 비교적 침착한 목소리로, 뭔가 자신이 할 일이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며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내가 데리고 가겠소. 머스그로브, 자세는 다른 분들을 돌보게." (167)


이 사건은 앤 역시도 웬트워스가 예전보다 더 깊고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장면은 소설의 주제인 진정한 사랑은 인내와 이성, 책임 위에 세워진다는 주제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 하겠다. 말수는 적지만 그녀의 신중하고 사려깊은 언행과 품위는 주변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앤의 모습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충동적인 감정보다는 이성과 신념, 타인에 대한 존중으로 설득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앤은 다음 날 그곳을 떠날 예정이었는데, 식구들 모두가 그 점을 염려했다. "앤이 없으면 어쩐다지? 우리끼리는 아무것도 못할 텐데!" 모두들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앤은 그들이 자신에게 토로한 소망을 서로에게 전달해서 그들이 모두 함께 라임으로 가도록 설득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설득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 곧 당장 다음 날 떠나기로, 가서 여관에 자리를 잡든지, 아니면 하숙집에 들든지, 상황을 봐서 정하고 루이자가 거동할 수 있을 때까지 거기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루이자를 돌보는 친절한 분들의 고생도 좀 덜 수 있을 거라고, 적어도 하빌 부인의 아이들이라도 돌봐서 부인의 고생을 좀 줄여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루이자의 가족이 그 결정에 워낙 만족해해서 앤은 설득하기랄 잘했다고 생각했다. (179)


그런데 소설에서 앤의 성숙한 행동에 영향을 주는 인물이 또 있는데, 바로 스미스 부인이다. 앤은 스미스 부인의 탄력성 있는 마음과 악에서 선으로 돌아서는 능력에 감동받는다. 이는 스미스 부인의 삶의 태도에 설득 당하는 앤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스미스 부인은 남편과 사별한 인물이다. 그녀는 화려했던 과거의 삶을 잃고 현재 가난하고 병이 든 채로 살아가고 있지만, 용기와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녀를 바라보고 관찰하며 생각한 끝에 앤은 그것이 단순한 의지의 힘이나 체념의 탓만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순종적인 사람이라면 참을성이 강할 것이고 지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의지력을 발휘하겠지만, 그녀에게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그녀는 탄력성 있는 마음, 쉽게 위로를 받는 성격, 악에서 선으로 선뜻 돌아서는 능력, 자기 속에 빠지지 않도록 뭔가 몰두할 것을 찾는 능력 등을 타고난 듯했다. 그것은 하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 중에서도 최상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자비로운 일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225)


스미스 부인의 삶의 태도에 설득당한 앤도 그녀에게 친절한 행동으로 호의를 보여준다.


스미스 부인이 잠시 사이를 뒀다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 앤이 나한테 온 게 얼마나 친절한 행동인지 내가 잘 안다는 걸 믿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훨씬 즐거운 일도 많을 텐데 다 제쳐 두고 내게 와서 함께 있어 주니 얼마나 친절한 일이에요." (281)


앤은 차츰 자기 성찰을 통해 내면적 힘을 길러간다. 이제 그녀는 주변 인물들의 의견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앤의 설득은 말이 아닌 진정성있는 삶과 태도로 보여준 설득이었기에 웬트워스 대령 또한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앤이 이성과 신념을 갖춘 성숙한 자세로 점차 자율성과 판단력을 갖춘 주체로 성장하고 있었기에 웬트워스 대령은 그녀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웬트워스는 그동안 앤이 레이디 러셀의 설득에 넘어간 사람, 그래서 그와의 사랑을 포기한 사람, 다른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는 사람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자신 또한 앤을 오해했고, 청혼을 망설인 이유도 자신의 자존심 때문이었다고 고백한다.


이 소설은 누가 누구를 어떻게 설득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설득당하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라 하겠다. 앤이 웬트워스를 말없이 설득하는 장면들, 웬트워스가 앤에 의해 설득되는 모습들, 웬트워스가 앤을 설득하는 장면, 다른 등장 인물들이 서로를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장면들이 소설 전체의 구도가 되고 있다. 소설은 우리가 누군가를 설득할 줄도 알아야 하고, 설득당할 줄도 알아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설득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들(특히 모든 사람이 앤이 적합하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임에서 루이자를 돌보겠다고 떼쓰는 메리)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때로는 남의 설득을 받아들일 줄 아는 성격이 단호한 성격만큼이나 우리의 행복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그가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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