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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자영 Jun 15. 2020

침묵에 대하여

좋은 사람을 가르는 나만의 기준


텅 비었다. 유난히 말을 많이 한 날,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나는 가슴에 커다랗게 구멍이 뚫려있는 상상을 한다. 30cm 정도 되는 구멍이 훤히 내 몸을 통과하고, 어떤 이야기도 쌓이지 못하고, 더이상 발신할 것도, 발산할 에너지도 없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공허함을 온 몸으로 느끼며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공허함은 잠시 사라지는 듯 했으나, 조금 더 오래 내 안에 머물러 있는 날이 늘었다. '말'이 좋아 말을 업으로 선택했으나 이런 날이 많아지자 점차 의욕도 떨어졌다. 나는 이 구멍의 원인을 찾기에 이르렀다. 이 공허함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한 동안 그런 구멍을 품고 다니다 나는 한 단어를 마음 속에 떠올렸다. ‘침묵’ 너무도 많은 말을 세상에 내뱉은 듯한 부채의식에 시달렸다. 유난히 말을 많이 한 날이면 나는 침묵에 대해 생각했다. 조금 말을 줄여도 좋겠다고, 조금 더 마음 속에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 쌓이고 쌓이면 그때 입을 열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박노해 시인을 좋아한다. 조금 거칠지만 있는 그대로의 삶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해주는 그의 문장들이 내 삶에 큰 위로로 다가왔다. 나는 가슴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더 많은 문장을 읽어내려 가려 했다. 처음엔 밑 빠진 독의 물 붓기처럼 채워지지 않더니 조금씩, 내 안에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이따금씩 꺼내보았던 박노해의 시. 





침묵의 불, 박노해 


때로 침묵이 말을 한다

말은 침묵을 낳지 못하지만

깊은 침묵은 이미 그 자체로

말보다 더 큰 울림으로 말하고 있으니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아는 자

때맞춰 옳은 말을 할 줄 아는 자


돌아보니 나는 너무 많은 말을 했다

이제는 내 깊은 곳의 영혼이 말할 차례다

광야가 말하듯, 사막이 말하듯,

우주가 우리를 감싸 안고 진실을 속삭이도록




때로는 침묵이 더 큰 위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침묵이 말보다 더 많은 말을 전하기도 한다. 어쩌면 인간의 언어로는 모두 이해하고 표현하지 못할 문제들도 오히려 침묵을 통해 마음을 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침묵은 있는 그대로도 언어가 될 수 있지만, 우리의 언어를 조금 더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윤활유가 되기도 한다. 한 수사학자는 “진정한 수사학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와의 공간”이라고 했다. 그만큼 타인과의 진정한 의사소통을 위해 우리는 말을 던지고 이 말을 상대방이 인지하고 받아들이기까지의 잠깐의 침묵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듣는 이와의 심리적 거리를 침묵이라는 시간의 거리로 지켜주는 것이다. 이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이기적으로 자신의 말만 내뱉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영업팀 소속으로 정말 다양한 사람들과 미팅을 하고, 여러 커뮤니티 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내 안에 사람을 가르는 아주 명확한 기준이 하나 들어섰다. 쉴새 없이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사람은 일적으로도 친목의 관계로도 다시 만나지 않는다. 이는 확고한 나만의 ‘좋은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다. 대부분 이런 사람은 삶에서 뿐만 아니라 일적으로도 여유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함께 무언가를 했을 때 옆에 있는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본인이 하고싶은대로 무작정 밀고 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듣는 이는 없다. 그저 말하는 자신만 있을 뿐이다. 


이를 조금 더 빨리 알았다면 좋았으련만, 지금이라도 이런 나만의 기준을 가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침묵은 여백과 같다. 말의 밑바당이고 없어서는 안될 공간이다. 시시때때로 그 역할을 변화하며 말에 쫄깃한 긴장감을 안겨준다. 하얀 도화지가 없으면 아무리 화려한 물감이라도 제 색깔을 낼 수 없듯이  우리는 침묵 위에 말을 쌓아나가야 한다. 때로 침묵이 말보다 훨씬 훌륭한 말이 되기 때문에.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침묵은 말의 변방이 아니다. 어쩌면 가장 깊은 그 중심.


글 | 채자영

2020.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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