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YS OF SAYING | 그 시작에 부쳐
어릴 적 참 많은 '막말'을 해오며 살아왔다. 그땐 그게 왜 잘못된 지 몰랐고, 그 말을 내뱉었을 때, 상대방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가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그 무심한 말이 모두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고 나니 조금씩 말을 내뱉기 전, 상대방을 생각하게 되었다. 상황에 따라, 앞에 있는 상대에 따라, 똑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뼈 절이게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험은 인생에서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어느 한 사람 덕분에 가능했다. 그와 앞에서 말을 나눌 땐, '도대체 저게 무슨 의미일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집으로 돌아와 생각해보면 '결국 저 말은 나를 무시하는 말이었군.'이라는 생각으로 기분이 몹시 상했다.
그런 경험을 몇 번 반복하자 나는 그를 피하게 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막말을 던지는 그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자신의 말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와 닿는지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 어쨌든 사람은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고 했던가.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인생은 각 장면마다 나에게 어떤 교훈을 주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말을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유난히 '말'과 관련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 덕에 '말'에 대한 감수성은 점점 더 짙어져갔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결정적 순간'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은 단박에 뿅 하고 등장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누구나 찾기 힘들다. 순간이라고 말하지만, 순간이 아닐 수도 있으며 점진적으로 지금의 나를 만든 어떤 경험의 축적일 수도 있다.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내 인생의 어떤 결정적 순간이 지금의 나를 이 자리로 오게 만들었는지 종종 생각한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매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던 장 그리니에의 섬에 보면 이 ‘결정적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로 ‘섬’이라는 수필의 서문을 알베르 카뮈가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지만 섬뜩할 만큼 자취도 없다." (장 그르니에, 섬)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중요하다고 믿는 것.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것. 아마도 이 글은 그 퇴적의 순간에 깊이 파묻혀 있던 나의 경험을 풀어놓는 책이 될 것 같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결정적 순간이 언제였을까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면, 늘 '말'과 함께한 순간이 있었다. 단순히 타인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설레던 시절을 지나 말의 껍데기 보다는 그 안의 진심을 잘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순간, 말을 계속 하다 보니 가슴 속이 공허해지는 것을 처음 으로 느꼈던 순간, 말의 본질을 찾고 싶었고 이러한 본질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어른’들을 찾아 나선 순간 등 말과 함께한 생의 각각의 순간이 나를 이끌었고, 지금 <어른의 말>이라는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만들었다.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여 말을 공부하고, 그렇게 원하는 말을 업으로 삼으며 말을 기획하고, 연차가 쌓인 지금 끊임없이 타인 앞에서 말을 하는 삶을 살아오며 나에겐 어떤 뚜렷한 가치관이 하나 자리잡았다.
말의 껍데기 보다는 그 안의 진심이 중요하다는 믿음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 일터의 현장이나 삶의 현장에서 많은 이들은 종종 이를 잊는다. 아니 어쩌면 공기처럼 너무나 당연하기에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깨끗한 공기가 사라지고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을 경험하고 나서야 맑은 하늘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처럼, 가슴 깊이 비수를 꽂는 말을 경험하고 나서야 나의 말을 돌아보는 실수를 범하곤 하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나 내가 경험한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말의 중심부보다 주변부가 각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말하기의 기술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내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자주하는 말이다. 기술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하고 더 이상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마도 8년 간 현장에서 주구장창 스킬만 다져왔기 때문이리라.) 다만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은 말의 기술이 아닌 말의 본질, 좋은 말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8년간 현장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역시나 모든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기술 보다는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고, 이 말은 곧 어떤 테크닉 보다 진심을 전하는 중심, 깊은 생각의 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곧 말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내가 그동안 찾아 헤맸던 말의 본질이 무엇인지, ‘말’과 관련된 나의 경험을 하나 하나 끄집어 내 보려고 한다. <어른의 말>을 돌아보며 이를 바탕으로 좋은 말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떤 말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왜 그것이 타인 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도 정말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도록.
2019년 4월 3일 (금)
글 | 채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