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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동아줄은 무조건 잡자

by 다우


임당 산모가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난생처음 식단 관리를 하니 첫째 때와는 달리 만삭이 되도록 팔과 다리는 마르고 배만 뽈록한 몸매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만삭 사진을 찍을 때 인생샷을 남기겠다는 마음으로 갔고 그 결과물도 꽤 만족스러웠다. 덕분에 오랜만에 카톡 프사를 내 사진으로 바꿀 수 있었다.


첫째를 제왕절개로 낳아 18개월 동안 겨우 회복이 되어 갈 즈음 둘째를 낳게 되었다. 자연분만에 대한 신화가 여전히 있었기에 첫째 제왕절개 후 둘째 자연분만의 시도를 하는 브이벡에 대해서도 알아봤지만 나와 같이 출산 텀이 18개월 정도면 위험성이 너무 높았다. 나와 아이 모두의 안전을 위해 둘째도 수술을 하기로 마음을 내려놓았다.


보통은 둘째 아이 선택 제왕수술 일정은 38주에 잡는데, 최대한 아이를 오래 품고 있고 싶어서 39주 1일 차로 계획했다. 앵두는 오빠에게 배가 눌려가면서도 예정된 수술 일자까지 엄마 뱃속에서 씩씩하게 잘 머물러 주었다.


눈이 펑펑 오는 날 앵두가 태어났다. 첫째를 수술로 낳고 겨우 붙은 살을 18개월 만에 다시 갈랐다. 집으로 돌아가서 내 몸에 집중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조리원에서 최대한 회복해야 했다. 수술하고 걷기가 너무 아팠지만 첫째 때보다 더 악착같이 움직였다. 조리원 침대에서 산후 요가도 열심히 했다. 덕분에 첫째 때는 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몇 날 며칠을 틈틈이 낮잠을 자며 회복해도 회복이 잘 안 되었는데, 나이가 두 살 더 많아졌어도 그때보다 집으로 돌아오고는 오랜만에 만난 연두와 빨빨거리며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앵두를 낳고 산후조리원에 있으며 몸을 회복할 수 있게 해 준 나의 첫 번째 육아 동아줄은 시어머니였다. 시어머니가 한동안 하시던 일을 무려 그만 두기까지 해서 시댁에서 연두를 돌봐주셨다. 시어머니의 도움이 없었다면 둘째를 낳자마자 두 아이를 돌본다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도움의 손길이 있다는 것은 구원이었다.


첫째를 낳았을 때는 퇴근하고 조리원으로 항상 왔던 녹도 퇴근 후에 조리원이 아닌, 연두가 있는 시댁으로 갔다. 오랜만에 혼자 있는 시간. 아니 뱃속에서부터 오빠 눈치를 받고 자란 앵두에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첫째 때는 조리원에서 자격증 공부를 한다고 난리였지만, 둘째 때는 그냥 먹고 자고 푹 쉬며 몸조리에만 신경 썼다. 그렇게 회복에만 신경 쓰는 2주를 보낸 후 조리원 퇴소의 순간이 다가왔다. 아이 둘 육아가 시작됐다. 고작 18개월인 첫째가 엄마의 상황을 알고 배려해 주는 게 아니기에 아이 둘을 돌보면서 허약한 내 몸을 지키기 위한 엄마의 살길을 찾아야 했다.


둘째를 낳으면 정부지원 산후도우미를 한 달 동안 지원비를 받으며 신청할 수 있었다. 허약한 몸을 가진 엄마인 나는 지원금을 받는 한 달뿐만 아니라 자비로 추가 한 달을 연장해서 총 2달을 할 수 있는 분으로 처음부터 알아봤다. 녹은 내가 얼마나 약한지 그리고 몸이 고단하면 짜증이 얼마나 늘어나는지 알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3달은 쓰라고 했지만, 백만 원에 가까운 돈을 내며 한 달 연장하는 것만으로도 짠순이인 나로서는 엄청 큰 마음을 먹은 거였다.


나의 두 번째 육아 동아줄 산후 도우미 분이 우리 집에 오셨다. 둘째를 낳았지만 여전히 내 첫사랑 첫째 연두와 다시 만나 애틋해하며 첫째랑 어떻게 보낼지가 관심사였던 나와는 달리, 둘째 앵두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돌봐주셨다. 아이 낳고 지친, 첫째를 신경 쓰느라 정신없던 철없는 엄마 보다 아이와 눈 맞춤을 자주 하며 “아이, 예뻐.”라고 진심으로 감탄해 주는 목소리가 여전히 내 귓전을 맴돈다. 덕분에 산후도우미분이 계시는 동안 마음을 놓고 낮잠을 자며 몸을 회복했다.


앵두를 낳고 떨어져 있는 동안 엄마에게 삐져서 쳐다도 안 보던 연두와 단 둘이 알콩달콩 버스 나들이를 하고 바깥 산책을 하며 관계를 서서히 회복해 나갔다. 시댁에 있던 기간과 며칠 가정보육까지 합해서 한 달 하고도 며칠 만에 연두를 오랜만에 어린이집에 보냈다. 그런데 아이의 등원 이틀 만에 고열이 났다. 느낌이 싸했다. 이튿날에 코로나 키트 검사를 하니 두 줄이 떴다. 38일 차 갓 신생아 딱지를 뗀 아기가 있는 집에 코로나 환자가 발생했다. 그날 이미 우리 집으로 출근했던 이모님께 이야기를 하니 혼비백산하며 곧바로 퇴근하셨다.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남편은 일을 하다 말고 반차를 쓰고 집으로 와서 바로 앵두를 시댁으로 피신시켰다.


나는 이미 연두와 많은 것을 공유하던 사이라 이미 글렀지 싶었다. 역시나 이틀 만에 고열이 나서 골골대기 시작했다. 함께 살던 내 동생은 집에서 마스크를 열심히 쓰고 방에서 따로 식사를 해서인지 끝까지 코로나의 공격에서 살아남았고, 38일 차 앵두도 빠른 격리 덕에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지나갔다. 다행이었다. 이모님 또한 코로나 음성이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 때문에 생업을 이어가지 못하는 날들이 며칠이 생겨서 죄송했다. 안 나오신 날을 다는 아니더라도 며칠만이라도 출근한 걸로 쳐드린다고 했는데 극구 사양하셨다.


휴.. 정신없이 한바탕 코로나가 훑고 간 집.


산후 회복하는데 코로나에 걸려 나는 몸이 더 약해져서 골골댔고, 남편도 코로나를 피해 가지 못하고 코로나가 다 나은 후에도 한동안 잔기침을 습관처럼 달고 살게 되었다. 하지만 되려 무섭고 무서웠던 코로나에 걸리고 나니 한동안은 괜찮겠지 싶어 마음은 오히려 편했다.


우리 집 코로나가 진정된 후 산후 도우미 이모님이 다시 오셨다. 애초에 2달 계시기로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거의 2달 반을 함께하게 되었다. 산후도우미가 끝나고 나서도 같은 동네에 사는 이모님이라 종종 산책하다가 이모님을 만났다. 앵두가 부쩍 자란 모습을 보며 감격해하며 "앵두야. 잘 지냈어?"라며 반갑게 인사해 주셨다. 슬쩍 우리에게 간식을 사서 안겨주시고 자리를 떠나실 때도 있었다.


낯선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내 부족한 살림 솜씨를 보여야 하는 게 부담도 됐지만, 아이 키우며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수 있을 때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무조건 받는 게 맞았다. 시어머니와 산후 도우미 나의 두 육아 동아줄을 잡을 수 있을 때 놓지 않고 꽉 잡길 참 잘했다.


*허약체질 엄마의 팁 : 산후도우미 연장할 때 비용이 업체마다 다르다. 업체에 상황을 이야기하고 가격 문의를 미리 해볼 것. 지역 화폐 결제가 가능하면 10프로 세이브는 덤이니 지역화폐 가능 여부도 체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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