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남긴 우리들의 시간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희미해지고, 여행의 감동도 일상의 소란 속에 잊혀 간다. 하지만 어떤 순간들은 마음속 깊이 남아,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미야코지마에서의 4박 5일은 그런 시간들이었다.
이번 여행은 우연의 연속이었다. 마일리지 만료가 다가오면서 급하게 떠나야 했고, 목적지도 그저 "따뜻한 곳, 조용한 곳" 정도로 정했다. 일정도 미리 세우지 못했고, 짐도 출발 전날 겨우 챙겼다. 준비가 너무 부족해 걱정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은 가벼웠다.
이번 미야코지마 여행은 내가 최애 여행지로 꼽는 뉴질랜드 여행만큼이나 만족스러웠다. 물론 스케일도 다르고 분위기도 전혀 다르지만, 어딘가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아, 여기로 오길 잘했네.'
도쿄에서의 분주한 일상과, 해야 할 일들의 리스트에서 한 발짝 벗어난 기분. 그렇게 시작된 미야코지마에서의 며칠은, 모든 것에 슬로모션을 걸었고, 나는 온전히 가족과의 순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했던 이 순간들을 얼마나 기억할 수 있을까?
돌아오는 그날까지 너무나 아쉬웠던 여행은 집에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면서, "이 순간들을 절대 잊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더 커졌다.
남편은 아직 남은 마일리지로 미야코지마에 가겠다며 바로 다음 여행을 예약하려고 했을 정도다 ㅎ
그래서일까. 일러스트 지도를 만들자는 생각을 하기 훨씬 전부터 이번 여행은 뭔가 그림을 그려서 남겨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일단은 언제나처럼 구글맵에 저장해 둔 여행지를 보면서 며칟날 어디를 다녀왔는지 대충 노트에 끄적거려 놓았었다.
이전에도 여행을 하면 기록을 남기고 싶었지만, 바쁜 일상으로 돌아오면 항상 흐지부지되곤 했다. 사진을 정리하는 것도 어렵고,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림으로 남기는 것도 사실 쉽지 않았다.
이번엔 남반구를 뺀 온 세상이 한겨울인 지금 미야코지마를 그리자니 너무 분위기가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끔씩 간단한 그림을 하나씩 그리는 정도로 체계적으로 전혀 정리가 안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지도라는 단순 명료한 매개체를 주제로 정하고 나니, 뭔가 달라졌다.
내가 본 귀여운 지도 일러스트들은 어떻게 이번 여행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지 정리하고 미야코지마가 어울리는 계절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바로 기록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번에 들은 인터넷 강의에서는 손그림으로 일러스트를 그린뒤 포토샵에서 가공하는 프로세스였지만 나는 지도에 넣을 장소가 정해진 후엔 프로그리에이트로 그려 전부 디지털로 마무리했다.
처음에는 관광지 중심의 일반적인 지도를 만들까 했지만, 작업을 하다 보니 방향이 조금 달라졌다. 그냥 유명한 곳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다니기 좋았던 장소들을 꼭 넣고 싶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리스트를 더 많이 참고해서 만들었다.
1. 여행지를 다시 돌아보기
여행 중 방문한 장소의 대략적인 위치 표시하고,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아이들이 특히 좋아했던 장소, 함께 시간을 보낸 곳들을 중심으로 리스트를 만들었다.
2. 지도 직접 스케치하기
구글맵을 참고해 미야코지마의 형태를 A3 용지에 먼저 연필로 그려 보았다.
완벽한 지도가 아니라, 우리가 다녀온 미야코지마의 모습을 담으려 했다.
3. 각 장소의 특징적인 장면을 여행사진을 보면서 일러스트로 요소로 표현
아이들이 뛰어놀던 요나하 해변의 하얀 모래사장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빛과 미야코섬 최남단의 등대
도망가던 소라게
떠나기 직전까지 아이들이 보고 싶어 있던 바다거북이
스노클링을 즐기던 딸의 모습
비행기 시간이 촉박한데도 들러서 먹은 망고 아이스크림
4. 지도 위에 각 요소 & 텍스트 배치
그려야 할 개체들이 의외로 많아서 중간에 힘이 빠지기도 하고 며칠 시간이 비면 그림체가 조금씩 바뀐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전체적인 색상을 정하고 글씨를 적어 넣는 것도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지만 내가 직접 찍어온 사진들을 참고해서 그리니 뭔가 더 애착이 갔다.
이렇게 완성된 지도는 단순한 관광 지도가 아니라, 우리 가족이 머문 시간과 감정을 담은 한 장의 일러스트가 되었다.
나 같은 경우는 현재 일러스트를 하고 있기 때문에 지도 일러스트로 기록을 남겼지만, 그림을 그리는 게 부담스럽다면 실제의 지도에 인터넷에서 찾은 사진이나 내가 직접 찍은 사진, 가지고 온 티켓, 명함 같은 자료들을 모아 두었다가, 오려서 스크랩처럼 붙여도 좋은 기록이 될 거라 생각한다.
순간을 기록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함께 여행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매개체로 함께 경험한 추억과 감상을 담아서 기록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것 같다.
이번엔 밤하늘의 별을 보러 갔던 기억만 일러스트로 남길 수 있었지만, 언젠가 막내가 처음으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물살을 느끼며 신기해하던 순간이나 소라게를 보고 신기해하던 아이들의 표정들도 일러스트로 담아보고 싶다.
아이들 셋을 데리고 여행을 다니다 보면, 힘들지 않냐 조금 클 때까지 기다리면 어떠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 편이다.
어떤 순간에 힘들다는 말이 절로 나올 때도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꾸 밖으로 나가는 이유, 사는 곳을 떠나 여행을 하는 이유를 이번 미야코지마 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도 많지만, 그만큼 예측 불가한 즐거움도 많다는 것. 모든 걸 다 꼼꼼하게 계획해도 계획대로 되지 않고, 전부 계획하지 않아도 그때 그 순간에 즐길 수 있는 걸 함께 즐긴다면 얼마든지 의미 있는 여행이라는 것.
아이들은 언젠가 이 여행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다들 손바닥 한 뼘만큼은 성장해 있는 것 같다. 이런 소소한 순간들이 쌓여 우리 가족만의 이야기가 되고, 기억이 된다.
조금은 엉성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방식으로 여행하면서, 우리만의 특별한 지도와 기록을 계속 쌓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의 다음 여행은 어떻게 기억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