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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창 Sep 30. 2023

즉흥연주는 적당히 뚝딱뚝딱




  영어를 대단히 잘하는 편은 아니다. 유학 시절 미국에 5년 살았던 게 전부이고, 그조차 이십 대 후반이었으니 원어민같이 유창하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장을 정확하게 말하고 싶은 욕심이 좀 있긴 한데 그게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관사며 시제며 이것저것 따지고 생각하다 보면 말이 막힐 수밖에. 그래서 일단 뭐라 뭐라 말하다 보면 스스로 느낀다. 아, 정말 대충 말하고 있구나 하고. 발음은 아예 큰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듣고 읽는 건 그보다 좀 나아서, 내 분야의 영어로 된 책이나 인터뷰 등을 이해하는 데에 조금 불편한 정도 -아주 불편한 건 아니고- 는 된다. 중고등학교 때 공부한 것도 물론 무시 못할 분량이긴 하겠지만, 언어적인 감각이 있는 편인게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쓰고 보니까 왠지 모르게 대단해 보이는데, 그 정도는 아니고 단어의 미묘한 뜻을 잘 파악하는 편이라고 해두자.

 

  좋아하는 몇 개의 영어 단어가 있다. 예를 들면 appreciate이다. 이 단어에는 '감상하다'라는 뜻과 '감사하다'는 뜻이 다 들어있다. 그건 감사하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감상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삐딱한 시선으로 깎아내리듯 하는 것 말고. 아무래도 남들 앞에 서서 연주하는 내 입장에서는 음악을 감상해 주는 이들을 만날 때 역시나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된다. 게다가 우리말로도 '감상하다'와 '감사하다'로 한끝 차이니 이건 뭐 대단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하나 더 꼽아보자면 realize도 있다. 명사형은 당연히 realization이 된다. 처음 배운 건 중학교쯤이었을까, '깨닫다'라고 이해하면 충분했던 단어였다. 하지만 realize 한다는 것에 '현실화하다'와 같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건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어떤 생각을 이 세상에 실재하는 그 어떤 것으로 구현해 내는 행위 말이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던 어떤 소리를 악기를 통해 세상에 펼쳐내는 순간, 관념으로만 존재하던 음악은 현실세계의 그 무엇이 된다. 그런 과정을 설명하기에 더없이 좋은 단어이다.   


  조금 다른 이유로 좋아하는 영어 단어가 improvisation이다. 우리말로는 즉흥 연주라고 옮기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정확한 번역이다. 악보에 적힌 대로 연주하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연주하는 것, 그걸 즉흥 연주 말고 뭐라고 부를 것인가? 많은 이들이 재즈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 재즈가 재즈이게 하는 본질적인 그 무엇을 즉흥 연주라고 말한다. 우리네 재즈 연주자들은 종종 줄여서 임프로, 임프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정작 영미권 사람들은 improv. -임프라브, 이렇게 읽으면 될듯한데-라고 줄이긴 하지만.


  감상자이던 내게 즉흥 연주는 마법과도 같은 일이었다. 어떻게 저런 멜로디를 끊임없이 매번 새롭게 떠올리고 그걸 바로 연주할 수 있다는 거지? 저 사람들은 천재인 게 분명해, 하면서 말이다. 연주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난 뒤의 즉흥 연주는 아무리 연습을 거듭하면서도 쉽게 뛰어넘지 못하는 벽이었다. 적당히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겠는데, 그다지 새로운 걸 연주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제와 같은 프레이즈를 오늘 또 연주하면서 나는 제대로 된 즉흥 연주를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전 코러스와 그게 그거인 다음 코러스를 연주하면서 자괴감에 빠졌다. 그걸 벗어나보자고 릭이며 이런저런 스케일 패턴을 애써 외운다 한들, 암기한 것을 꺼내 연주하는 순간 이미 즉흥 연주는 물 건너 간 게 아닐까? 아니, 즉흥 연주를 연습한다는 게 본질적으로 말이 되기나 하는 걸까? 그렇게 즉흥 연주란 늘 새로운 것을 펼쳐내기를 요구하는 것 같았고, 지나치게 거창한 그 단어의 무게에 짓눌려있었다. 그런데 한참 영어를 읽고 듣다 보니까 그들은 improvis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조금 더 가벼운 의미를 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빅터 우튼은 형제가 많은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5형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음악도 형들 하는 걸 어깨너머로 보면서 배웠다고 했다. 빅터 우튼은 자신의 슬랩 베이스 주법은 형 레지 우튼이 기타로 하던 걸 베이스로 옮겨 놓은 것뿐이라고 나름 겸손하게 말하곤 한다. 실제로 레지와 빅터, 두 형제가 같이 연주하는 영상을 보니 사실이긴 했다. 그렇지만 같은 주법이 어떤 악기를 만나느냐에 따라 천지차이로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타로 연주하는 슬랩과 플럭은 신기하긴 해도 가슴 벅찬 느낌을 주지 못했다. 소리가 너무 얇았으니까.


  그건 그렇고, 형제 많은 집이 대체로 그렇듯 그다지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한 건 아니었다고 한다. 뭐 옷이건 책가방이건 형들의 것을 물려받았겠지. 매번 새 걸 사줄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않았던 우튼 패밀리의 부모님은 늘 '임프로바이즈'해야 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침대 다리가 부러졌다고 막내 빅터의 것을 새로 사 준다거나 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니, 주변을 둘러보고는 비슷한 것들을 가져다가 적당히 뚝딱뚝딱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게 임프로비제이션이었구나, 손에 닿는 재료들로 적당히 뚝딱뚝딱, 해 보는 것. 넘볼 수 없는 완벽의 경지를 꿈꾸며 상상하는 즉흥 연주가 아니라 대충 적당히 임프로바이즈 하는 것 말이다.


  비슷한 얘기로는 좋아하는 노래를 가져다가 슬쩍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바꿔서 세상에 돌려주는 것이 재즈라던 한 뮤지션 -에티엔 찰스-의 말도 생각난다. 그런 즉흥연주, 임프로비제이션이라면 나도 해 볼만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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