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윤동주 <흰 그림자>

by 제이비

흰 그림자 /윤동주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그림자는 어둠을 끌고 다니지만, 윤동주는 그것을 ‘흰’이라 불렀다. 나는 이 모순적인 제목 위에 오래 머물렀다. <흰 그림자>는 화려하게 채색된 장면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흑백사진 속에 스며든 옅은 빛에 가까웠다. 현실에 닿을 수 없는 어떤 빛, 끝내 손에 쥘 수 없는 무언가를 불러내는 듯하다.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화자는 하루 종일 무엇엔가 시달리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듯하다. 그때 들리는 <발자취 소리>. 현재 진행형인 ‘발소리’가 아니라, 이미 지나가고 남은 흔적이 담긴 ‘발자취 소리’다. 그것은 마치 현실 속에서 아픈 기억들이 가슴속에 오래 남아 울리는 소리처럼 다가온다.


<나는 총명했던가요>라는 물음은 화자의 깊은 자책이 담겨있다. 청춘의 한때 그는 하늘과 바람과 별 같은 순수한 이미지에 마음을 기울였지만, 현실은 이미 민족의 이름과 삶을 앗아가는 잔혹한 시대였다. 시대의 비극을 일찍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후회, 시인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이 이 질문 속에 겹겹이 묻어 있는 듯하다.


이어 화자는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씩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이는 내 안에서 오래 갈등하던 자아들을 더는 붙잡지 않고 보내는 모습처럼 보인다. 양심을 지키려던 나, 순수한 꿈을 꾸던 나, 빛을 잃지 않으려던 나. 그렇게 떠나보낸 뒤 남는 것은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다. 흰 그림자는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지켜내고 싶었던 내면의 순수, 곧 순결한 자아로 읽힌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소리 없이 사라진다고 했을 때, 더욱 깊은 허무와 무력감이 전해진다.


4연에서 반복되는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은 화자의 절망을 가장 애틋하게 드러낸다. 이미 떠나보낸 것들이지만, 오히려 사라졌기에 더 선명해지고 잃었기에 더 강하게 다가온다. 부재가 존재를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는 이 역설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언뜻 보면 담담한 체념이나 태연한 위안처럼 읽히지만, 나에게는 가장 깊은 절망의 고백으로 다가왔다. 희망을 잃고 버텨야 하는 날들, 꿈을 떠나보낸 뒤의 공허를 그저 풀을 뜯는 양의 모습에 빗대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름없이>라는 표현에서도 오히려 그의 시름이 느껴진다.


여기서 ‘양’은 기독교에서는 희생을 상징하며 제물로 바쳐질 운명을 지닌다. 윤동주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시인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 마지막 구절은 단순한 체념의 태도를 넘어서, 자신을 시대의 희생물로 <의젓하게> 받아들이는 자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끝내 지켜내지 못했지만, 순결한 자아를 향한 마음만은 시 속에 남겼다. <흰 그림자>는 절망의 기록이면서도 동시에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고백으로 읽힌다. ‘흰’과 ‘그림자’가 나란히 놓여 있듯, 윤동주의 시에는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이 함께 머물며 서로를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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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과제로 「흰 그림자」에 대한 감상문을 제출했다.

이 시에서 윤동주는 늘 시 속에 머물던 ‘괴로워하는 자아’를 잠시 돌려보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시와는 결이 달라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깊은 절망을 느꼈다고 썼지만, 교수님의 생각은 달랐다. 늘 고통을 짊어진 윤동주가 이 시에서는 잠시라도 쉬어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시대의 아픔 속에서도 실낱 같은 덜어냄을 품은 시였으면 좋겠다는 말씀이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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