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대학원에 입학하게 된 계기는 ‘나를 알고 싶어서’였다. 내 감정을 알아차리고 싶었고,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나를 알고 싶은 것’ 이면에는, ‘나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 존재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가 벌써 몇 년째인데, 넌 아직도 애처럼 거기에 머물러 지지부진하게 살아갈 거야’라며 자신을 손가락질하면서도, 그 감정에서 이제 자유로워지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알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계속해서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불안함과 답답함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안에 자리한 무언가 알 수 없는 구멍들이 다수 존재하는 것이 느껴졌는데, 이것을 도저히 어떻게,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알지를 못했다.
대학원을 왜 가냐는 질문은 입학을 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물리적으로 타인에게서 들은 질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건넨 질문이었습니다. 너는 이 과정을 통해 무엇을 깨닫기 원하니. 그 질문에 내린 답은 ‘나는 나를 잘 모르겠어. 나를 알고 싶어’였습니다.
(개인 블로그 일기 <나를 모르는, 친애하는 그대에게> , 2020.08.09.)
나는 나의 서브텍스트(subtext)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다. 종종 내가 하는 행동이나 감정 변화가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이 존재했다. 서브텍스트는 말이나 행동 뒤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뜻한다. 외부로 드러나는 텍스트에 내포된 것은 발화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재된 의미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바로 서브텍스트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몸짓이나 목소리 톤, 눈빛 등을 통해 드러나며,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순간들에 늘 포진해있다. 상담 현장으로 가져와 살펴보자면, 상담자가 내담자의 서브텍스트를 기민하게 알아채는 것이, 내담자의 주호소문제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는 열쇠가 됨을 의미한다.
나는 나의 서브텍스트가 어려웠다. 어떨 때는 서브텍스트가 드러나지 않고 모호하게만 느껴졌다. 말과 행동의 연결고리가 자연스럽지 않으며, 삐걱거리는 것만 같았다. 스스로도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 지점들이 존재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는 ‘나’라는 인물의 서브텍스트를 알고 싶어 문학치료를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서브텍스트가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자신의 어려움이나 외상적 사건을 직면하는 것이 어려워 서브텍스트가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존재한다. 본능적으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부지불식간에 촉발되는 거절이나 거부의 행동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서브텍스트들의 실마리는 의식의 깊은 곳에 깔린 문제들로부터 비롯된 뒤틀린 현실을 지각하고, 문제를 직면함으로써 열리기도 한다.
또한 창작자가 되고 싶은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또 거기서 쌓은 서브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여 캐릭터를 만들어가게 될텐데, 나는 그게 늘 쉽지 않았다.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서브텍스트를 파악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웠다. 심지어 그 대상이 ‘나’라고 하니 더욱더 난제를 만난 느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감정’의 영역은 어려운 부분 중 하나였다.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던 즈음 지인이 나에게 건넸던 “언니 지금 마음이 어때? 언니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아”라는 질문이 내 안에 오랫동안 맴돌았다. 그때 처음으로 ‘감정’이라는 것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로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내가 스스로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에 참 무딘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 첫 사건이었다.
타인의 감정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류를 민감하게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가능했지만, 상대적으로 나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일이 저에게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치며, 무시하고 꾹꾹 눌러 담아놓았던 나의 감정들은, 나비효과처럼 거센 폭풍이 되어 나에게 돌아왔습니다. 나름 스스로가 배려심 깊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정작 나는 나에게 제일 배려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나를 제일 몰랐습니다. 나를 가로막았던, 거대한 벽의 첫 벽돌을 발견한 기분이었습니다. 나와 친해지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개인 블로그 일기 <나를 모르는, 친애하는 그대에게>, 2020.08.09.)
타인의 감정은 표정이나 몸짓 등의 비언어적인 것을 통해서도 나름 짐작이 가능한데, 스스로의 감정은 발화나 비언어적인 것 중 어느 것으로도 단서를 얻을 수 없으니 알아채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학업과 TV드라마 작가원을 병행하던 대학원 초기에, 나를 어렵게 만들었던 것 역시 ‘감정’의 영역이었다. 당시 대본을 쓸 때 계속 부딪히게 되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상황에 맞는 인물의 감정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을 잘 모르겠으니, 그에 맞게 대사를 쓰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그 이후에 여러 대학원 이론 수업들을 들으며 '스스로 감정을 잘 알아채지 못하는 원인'을 하나하나 알아가기 시작했다. 참으로 지난한 과정이었다. 지난 내 삶의 행적을 이론과 연결하고,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 과정은 눈앞에 흩뿌려진 짙은 안개를 걷는 것과도 같았다. 그렇게 파악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어린 시절의 혹독한 양육 환경에 대처했던 나의 방어기제로부터 기인한 메커니즘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감정적 둔마는 정서적으로 유기하는 양육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오랜 시간 쌓아 올려진 생존 본능이었다.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린 시절 본능적으로 자기 단절이 고통을 경감시켜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두려움이나 상처로부터는 당장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모든 감정이 너무 둔해져 삶 자체가 실제가 아닌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끼게 될 가능성이 있다. 스스로에게 자기 자신이 낯선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대학원에 들어오게 된 이유가 제가, 제 스스로가 궁금해서 들어오게 됐거든요. 나를 잘 모르겠고 일차적으로 내게 지금 일어나는 이런 감정들의 원인을 잘 모르겠는. 그러다 보니까 원래 문창과를 나와서 글을 썼었는데 글을 쓸 때 뭔가 남을 흉내 내는 것 같은 느낌이 되게 많이 드는 거예요. 나는 내 글을 쓰고 싶은데.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내 글을 썼을 때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걸 여러 번 깨닫게 되니까 그러면 내가 하는 생각이 일반적이지 않은 건가? 라는 약간의 두려움 그런 것도 들어서. 그러면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좀 알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대학원에 오게 됐고, 그러다 보니까 아직도 저는 제가 궁금해요. 그 궁금함의 가장 근본의 원인이... 저는 엄마를 사별한 그 시점부터 조금 풀면 나를 조금 더 잘 알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집단상담 1회기 축어록, 2020.11.10.)
감정을 세분화하고, 나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이 어려운 나에게, 인물의 감정을 세밀히 묘사하고 행간의 의미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자꾸만 인물의 성격이 납작해졌고, 감정은 단순하게 그려졌다. ‘이럴 때 보통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지’라는 생각이 들며, 내가 가진 감정 인식 체계가 어딘가 삐걱거리며 고장 난 것 같은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창작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다루지 못한다는 것’은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이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와중에 TV드라마 작가원에서 받은 피드백은 나를 더욱 절망에 빠트렸다.
내가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게 ‘이게 아니란 말이야?’라는 것에 대해서, 계속... 되게 약간 좀 두려움으로 다가왔었어요. 그러니까 두려웠다는 이유는 나는 계속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이게 대중과 소통되지 않는 나만의 이상한 사고방식이면, ‘이거는 안 되지 않나?’라는 생각의 두려움도 한몫을 했었어요. (중략) 그 이후에 글을 쓰면서 계속해서 그런 감정들은 올라오는 것 같아요. 내가 지금 제대로 감정선을 쓰고 있나, 이런 생각.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라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지를 계속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근데 그러면 안 되는데, 계속해서 그런 피드백이 제 안에서 제동으로 작동을 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아까 처음에 얘기했던, ‘다른 사람 흉내 내는 글을 쓰는 것 같아’라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밖에 없게 되고 그런 게.
(집단상담 1회기 축어록, 2020.11.10.)
내가 현재 어떤 기분이고, 어떤 감정인지 파악하는 것이 어려운 상태에서, 등장인물의 감정을 세밀하게 묘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감정을 흉내 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타인의 감정을 유사하게 따라 하고 다른 사람들이 할 법한 대사와 감정 표현을 언어화한다는 것은 ‘내가 없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서사의 구체성을 지니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으며, 나의 것이 대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았다. 분명 처음에는 내가 쓰고 싶어서 쓴 대본이었지만, 점점 서사가 진행될수록 누구나 할법한, 그리고 기성 작가들이 창작한 서사를 유사하게 복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 것이 없이, 다른 사람을 흉내 내고 있었다.
내가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이 대본을 통해 ‘드러날까 봐’, ‘들킬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것을 감추고자 엉뚱한 것에 진을 빼고 있었고, 그럴수록 대본은 점점 서사의 방향을 잃게 되었다. 내가 이 대본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결말을 찾을 수 없었다. 길을 잃은 대본이 되었다. 이러한 나의 두려움은 고스란히 창작한 대본에 드러났으며, 그렇기 때문에 창작물에 대한 합평이 더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마치 치부를 들키는 것만 같은 수치심과 두려움이 함께 올라왔다.
이러한 모호한 결말과 서사 진행 방식은 나의 미메시스Ⅰ인 자기이야기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인식한 나의 자기이야기가 바로 이런 모호한 형태를 지녔기 때문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내 삶의 이야기를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늘 너무 어려웠다. 무언가 이야기를 구체화 시켜서 말하려고 하면, 손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 것처럼, 손가락 사이로 이야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자기이야기를 구체화 시키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새로운 모임에서 으레 하곤 하는 자기소개 시간이 두려웠다. 나를 어떻게 소개하고 표현해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그저 ‘모호하게’, ‘두루뭉술하게’만 나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기방어의 일환이기도 했다. 나의 이야기를 직면하기 어려워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표현된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였다.
그 당시 내 안에는 수많은 ‘왜’라는 물음이 떠다녔다. 그 질문들의 답을 찾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자리 잡았던 것은 ‘왜 아직도 넌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야’라는 질문이었다. 사별의 어려움에 대해서 흔히들 ‘시간이 약이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고들 말하기에 나도 그럴 수 있을 줄 알고 그저 덮어두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는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미해결된 감정은 갈수록 골이 깊어지고, 애도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사별한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나의 내면엔 어머니가‘강력한 군주’로 군림하고 있었고, 외적으로는 독립한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 타인의 기준에 얽매인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의 실체는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녀의 눈치를 보며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와 맺었던 실패한 관계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너무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어 스스로를 다그치며 채근했다.
그 악순환의 고리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시시때때로 불청객처럼 찾아들었던 침습적 사고였다. 일상을 살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은 내가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도 더욱 깊이 빨려가고야 마는 갯벌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여전히 사별한 어머니를 떠올리면 분노와 슬픔, 우울감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당시 나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했기에, 이름도 붙이지 못한 채로 “엉켜있는 매듭”이라 표현하곤했다.
이러한 엉킨 매듭에서 기인한 감정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선망으로 치환되어, 창작한 서사에 스며들었다. 그때 당시에 내가 창작한 <잘 먹겠습니다> 대본의 서사를 보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선망과 후회, 아쉬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의 컨셉은 “33살의 딸과 33살의 엄마가 만나는 타임슬립”이며, 주인공 이윤서가 2019년과 1995년을 오가는 과정을 통해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쌓였던 해묵은 감정과 오해들을 풀게 된다. 작중 인물을 통해 발화하고 행동했지만, 이는 결국 나의 미메시스Ⅰ이 투영된 것이었다. 주인공 이윤서의 언어는 결국 나의 발화이자 동시에 바람을 담은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영영 소유할 수 없는 것을 갈망하고 바라는 그 마음은 종국에 억울함을 불러 일으켰다.
이와 유사하게 유년 시절을 회상할 때에도 억울함, 속상함, 안타까움 등의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 뒤엔 어김없이 어머니를 향한 미움, 분노가 뒤따라왔다. 그러나 이 감정 역시 그때 당시에는 정체를 알 수 없었기에, 이름을 붙이지 못한 채 미지의 영역으로 오랫동안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일상에서 이러한 침습적인 사고들이 부지불식간에 정신을 할퀴고 가면, 그 자리에는 공허함과 허무감만이 남았다. 그 감정 뒤엔‘이런 마음을 말할 대상인 어머니는 이제 이 세상에 없는데’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찾아왔고, 이후엔 갑자기 무기력해져서 “그래서 난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는 그로기 상태에 빠져버리곤 했다.
나에게 어머니는 늘 엄격했고, 완고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모든 일에 완벽을 기하며, 흐트러진 모습 보이기를 싫어하셨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을 제외하면, 힘든 투병 생활 중에서도 늘 눈썹 정리를 깔끔하게 하고 외적으로 완벽해 보이게끔 정갈함을 유지하셨다. 그전까지 나는 평생 어머니의 눈썹이 늘 단정하고 고른 줄로만 알았다. 어머니의 이러한 섬세하고 외부요인을 통제하는 성향은 자녀인 나에게까지 적용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기준은 학업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보다 훨씬 웃돌았으며, 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나’는 쓸모없는 패배자 취급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내가 너를 어떻게 낳았는데”라고 말하며, 자신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나를 향해 체벌을 내렸다.
일상생활에서도 어머니는 질병으로 인한 신체적 예민함을 드러내며, 정서적 불안감을 자주 표출했다. 장기투병환자 특유의 신경질적인 모습이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불쑥 올라오곤 했다. 장기투병환자의 자녀는 양육환경에서 정서적 혹은 심리적 보살핌을 충분히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투병환자의 경우 질병으로 인한 신체적 피로함과 고통을 자주 느끼게 되며, 이것은 죽음으로부터 오는 근원적인 두려움과도 결부되어 있다. 그들은 쉽게 예민해지며 심리적인 불안감이 높아지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이 장기적으로 반복될 경우, 정신적 안녕감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와 같은 정서적인 불안정함은 돌봄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어린 자녀를 양육하는 데 있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어머니의 말은 대부분 서브텍스트로 가득했다. 심부름을 시킬 때면 “거시기에 가서 거시기 좀 가져와”라고 하실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녀가 지금 취하고 있는 자세나 하고 있던 행동, 그리고 주변에 놓인 물건들을 통해 말 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해야만 했다. 그것들로부터 정보를 모은 후, 몇 가지 ‘대상이 될만한 것들’을 가져가야 했다. 개중에 하나라도 있으면 다행이었고, 없으면 “그것도 모르냐”고 혼나기 일쑤였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그래도 재차 참을성 있게 설명을 덧붙여주실 때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녀의 일관되지 않은 양육 태도 방식은 나에게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언제 어디서 그녀의 분노가 폭발할지 알 수 없어 시한폭탄을 옆에 두고 살아가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당신의 기분에 따라서 그때그때 체벌의 기준이 달랐고, 혼을 내다 본인의 분을 못 이기면 ‘집을 나가라’고 소리치며 실제로 쫓아냈다. 심지어 혼나면서 울음을 터트리기라도 하면 더 매를 맞았기에, 울음을 꾹꾹 참으며 방으로 가 수건에 고개를 박고 소리 없이 울음을 토해내곤 했다.
엄마는 내게 데시벨이 높은 존재로만 자리잡혀 있어. 자주 혼냈는데, 늦어서 혼나고, 웃어서 혼나고, 졸아서 혼나고, 일찍 와도 혼나고. 그래서 나중에는 내가 울면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도, 그냥 허상뿐인 것 같아서, 어느 한 순간부터는 때리면 때리나보다, 하고 초점 없는 눈빛으로 맞았지. 그렇게 하니까, 이제 안 때리더라고.
(1차 개인상담 4회기 자기분석일지, 2020.02.04.)
어머니는 자신이 통제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상황도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나 학원이 끝난 이후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5분이라도 늦을 경우, 현관에서 엎드려뻗쳐를 하며 늦은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해야 했다. 집에 친구를 데려오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건강이 좋지 않기에 체력적으로 힘들어 손님이 오는 상황을 싫어하시는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나를 양육함에 있어서 변수가 생기는 것을 싫어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친구와 함께 방에서 놀고 있던 나를 불러 큰소리로 혼을 내시곤, 거실에서 혼자 공부하도록 나를 통제하셨던 상황이 오래도록 유년 시절의 상처로 남아 있었다. 내 방에 홀로 있던 친구가 다 들을 만큼 큰 소리였고, 나는 그 후로 방에 들어가 친구에게 상황 설명을 하지도 못한 채, 곧바로 거실에서 눈물을 꾹꾹 참으며 학습지를 풀었던 기억이 있다. 혼자 방에서 나를 기다리던 친구는 얼마 후 가방을 챙겨 나와 어색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친구를 집에 데려올 수 없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했던 생일파티에서도 어머니는 “내가 너를 낳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감사 인사를 받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너가 축하를 받는 게 맞는거냐”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무슨 의미로 하신 말인지 이해가 되지만, 그때 당시의 어린 나는 그 말이 못내 가슴에 와서 박혔다. 이 말은 어머니가 늘 자신의 병력을 소개할 때면 말했던 “내가 얘를 낳고 아프기 시작했어”라는 말과 결합되어, ‘나는 태어난 것도 축하받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이때쯤부터였을까, 나는 내 생일이 기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생일이라며 축하해 달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말하며 편지나 선물 등을 준비해주면서도, ‘이게 왜 축하받을만한 일일까’ 진심으로 알지 못했다.
어머니의 통제는 나의 식습관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저녁 6시 이후로 무언가를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 유일하게 예외가 되었던 때는 시험 기간뿐이었다.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어 잠을 깨워서라도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배달음식도 금지였다.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특별한 일이 있거나 가끔 어머니의 기분이 내킬 때 시키기도 했지만, 1년 중 한 손에 꼽을 정도로 횟수가 적었다. 어린 나는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뛸 듯이 기쁘면서도 티를 낼 수 없었다. 기쁜 마음을 감춘 채, 무표정하게 메뉴를 고르곤 했다. 너무 기뻐하면 주문하려던 것을 취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점점 지나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될수록, 그녀의 예민함은 극에 달했고 사용하는 언어들도 더욱 거칠어졌다. “같은 공간에조차 있기 싫다”, “얼굴을 보면 구역질이 난다” 등의 문장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그림 2-1>과 <그림 2-2>는 당시 나의 심리적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그린 그림으로, 각각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때의 그림이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위와 같이 신체가 분절되어 있거나, 해부되어있는 모습을 자주 표현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상처입히는 단어들을 거침없이 발화했고, 그럴수록 나는 더욱 입을 다물며 조용히 살아가기를 선택했다. 내 존재가치가 부정당하고 폄하되는 발언들은 영혼에 새겨져 고스란히 상처로 남았다. 그 어떤 감정이나 생각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며, 침묵하기를 선택하는 내 스스로의 모습이 마치 기계처럼 느껴졌다. “내 몸 어딘가에 바코드가 찍혀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에도 쏟을 곳 없는 답답한 마음과 감정을 그 당시의 나는 그림으로 자주 표현하며 나름의 숨 쉴 구멍을 찾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집에서 웃는 행위도 마음껏 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동네 친구와 함께 집에서 과외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날도 수업을 마치고 함께 거실로 나오며 가벼운 수다를 떨고 있었다. 대화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제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사소하고, 중요도가 높지 않은 대화였기 때문이다. 꽤 웃음 포인트가 있는 얘기였는지, 선생님과 친구, 나 모두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하지만 거실에 있던 어머니는, 우리의 이 웃음소리를 듣고 갑자기 “왜 웃는 것이냐. 나를 보고 비웃는 것이냐”며 불같이 화를 내셨다. 세 명은 모두 당황해서, 아니라고 방금 주고받은 대화가 웃겨서 웃은 것뿐이라고 손사래를 치며 얘기했지만, 어머니는 이미 완고하게 본인의 생각에 사로잡힌 뒤였다. 친구와 선생님이 모두 당황스러워하며 돌아가고 난 뒤, 나는 어머니의 앞에 서서 한참 동안 홀로 분노의 폭격을 맞아야 했다.
당시 어머니는 담관 폐쇄로 인해 한쪽 옆구리에 작은 호스를 달고 계셨는데, 거실로 나오며 들린 웃음소리가 어머니의 그 모습을 향한 비웃음이라 오해한 것이었다. 하지만 거실에 나오던 우리의 시야에는 어머니의 그 호스 주머니가 전혀 보이지도 않았을뿐더러, 어느 누구도 어머니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저 수업이 끝난 후, 방을 나왔을 뿐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정말 아니라고 말하며 거듭 사실을 소명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럼 내가 잘못 봤단 말이야?”라고 말하며 더욱 거세게 분을 내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영혼이 소멸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내가 살아남기 위해 생존방식으로 택했던 것은 바로 ‘감정 제거’였다. 이러한 감정 제거 방식은 어린 시절 감정을 드러냈을 때 긍정적인 피드백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감정 표현이 어려운 양육 환경에서 자란 경우,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는 생존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방법이 어린 내가 스스로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분노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더불어 ‘솔직해지는 것’도 내게 너무 어려운 영역이었다. 솔직하게 사실을 전달하고 나의 의견을 피력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을 반복해서 경험했기 때문이다. 솔직함의 대상은 상황에서 뿐만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까지도 이어졌다.
나는 그렇게 나에게도 솔직해지지 못했고, 나의 솔직한 마음도 알 수 없이, 회피하며 살았다. 내가 살아온 양육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난 최대한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은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솔직함은 나를 보호할 수 없었다. 기쁨도, 슬픔도, 즐거움도, 식욕도, 물욕도 어떤 것도 드러낼 수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검열과 질책, 자기반성도 늘 따라다녔다. 내가 발화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 ‘혼날만한 범주의 것인지’ 나도 모르는 사이 자동반사적으로 검열했다.
어린 시절부터 긴 시간 동안 무의식적으로 체화된 이 정서 작용은 오래도록 스스로의 감정에 무감하도록 만들며, ‘왜 힘든 건지’, ‘힘들다는 게 어떠한 감정에서 기인한 것인지’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러한 어린 시절의 영향은 어머니를 사별한 이후에까지 영향을 미쳐, 유연하게 애도가 이뤄지지 못하고 지연되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스스로가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쉽사리 인식하지 못할 만큼 심리적으로 지쳐있었고, 둔감해져 있는 상태였다. 오랫동안 짊어진 혹과 같은 감정들이었기에, 힘들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도, 방법도 알지 못한 채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