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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국 방구석 주부 Jul 30. 2022

감사함이 넘치는 퇴거 준비

D-2

해외 이주에 앞서 집을 빼야 하는데,  날짜를 출국 당일이 아닌 하루 전날로 정했다. 정신없이 짐을 빼고 그날 바로 출국한다고는 도대체 상상할  조차 없었다. 그래서  하룻밤만 공항 근처 호텔을 예약하고 집을 하루 전에 빼기로 했다.


집을 하루 전에 빼는 또 다른 이유는 혹시 ‘셋집의 보증금을 떼일까 봐’였다. 계약 날짜대로 집을 빼는 것도 아니고 뒤이어 다른 세입자가 들어오는 것도 아니어서, 괜히 보증금을 떼일 것만 같았다. 그래서 바로 출국을 해버리면 대응이 안되니 그걸 위해서라도 하루 여유를 둔 것이었다.


그런데 어젯밤 늦게 집주인이 보증금을 보내왔다. 마침 관리비 정산금과 장기수선충당금 정산도 마쳤는데 내가 정산해서 받을 돈이 만 원 아래길래 안 주셔도 된다 하려는 참이었는데, 먼저 보증금을 보냈다고 연락을 해 왔다. 나는 미리 보내 주셔서 감사하다. 관리비/수선 충당금이 이래 나왔는데 금액이 적어 퉁쳐도 무관하다, 덕분에 잘 있었다, 감사하다, 등등 서로 폭풍 카톡 인사를 주고받고는 이야기를 마쳤다.


조금만 말에 가시가 돋치거나 불신하는 마음이 거세면, 같은 과정을 거치더라도 서로 잔뜩 경계하면서 상대방의 의도를 의심하고 혹시 날 속이지는 않을지 경계하게 된다. 그런다고 대화나 과정의 결과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텐데도 말이다.


어쨌든 배려심 넘치는 집주인 덕분에 화기애애한 대화를 마치고 잠이 들었었다.


오늘 오전엔 재활용센터에서 대형가전을 수거하고 가스비 정산을 하고 인터넷 티브이 해지를 하는 등 각종 서비스를 종료하는 일들이 연달아 있는 날이었다. 아침에 가스 검침원을 시작으로 재활용센터 사장님, 통신사 기사까지 오전에 주르륵 방문했다.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도시가스 해지는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고, 재활용센터 사장님은 혼자서도 척척 에어컨, 세탁기, 냉장고를 분리해 들고나가셨다. 어찌나 뻘뻘 열심히 하시는지, 너무 더워 보이셔서 콜라와 주스 등을 챙겨 드렸다. 인터넷 티브이는 오전에 이미 해지 문자가 온 터라, 기사님이 장비만 회수해 가셨다.


불과 두세 시간만에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던 수많은 시설들이 사라져 버렸다. 오늘 완전 폭염인데… 에어컨을 떼어 가버렸다. 전화기도 알뜰폰 초저가로 요금제를 바꿨는데 인터넷도 멈췄다. 냉장고가 없어서 시원한 물도 마실 수가 없구나. 도저히 에어컨도 없이 짐 싸기를 계속할 자신이 없어서, 잠시 몸을 식힐 겸 근처 쇼핑몰로 향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초밥 트레인 집에 가서 아이에게 계란 초밥을 조금 먹이고, 다 닳아버린 아이의 샌들을 새로 삭 위해 신발 가게에 갔다. 아이가 원하는 신발을 사주고 싶은 건 부모의 인지상정 이건만, 아이와 어떤 신발을 사는 과정을 쭈욱 겪다 보면, 열불이 나서 참을 수가 없다. 뭐가 그렇게 요구하는 것이 복잡하고 다 맘에 들지 않는지… 특히 나처럼 늘 차선을 고르는 것이 익숙한 사람에게는 그런 딸아이의 성격을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 아이의 샌들 사기 미션은 ‘때려치워!’로 마감하고 더위도 식힐 겸 팥빙수를 먹었다. 팥빙수! 미국에서 먹기 힘든 음식 중에 하난데… 모처럼 맛있게 먹어서 기분이 좋다.


늘 차만 타고 다니다가 버스를 타며 돌아다니니, 더운 여름날 죽을 맛이다. 아내는 늘 나에게 우아하게 차나 타고 다니니 돼지같이 땀 흘리며 대중교통에 몸을 싣는 소시민의 삶을 이해 못 한다며, 반농담으로 날 면박 주는데, 정말 그 말이 맞는 듯싶다. 에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는구나.


남은 가구도 다 재활용 쓰레기장에 다 내놓았다. 이제 남은 건 오늘 밤 우리 몸 뉘일 매트리스 한 장이다. 오늘도 쓰레기장을 한 열 번 왕복한 것 같다.


침대 프레임을 분해하다 보니 분해를 위한 맞는 공구가 없다! 퀸 사이즈의 침대 프레임을 분해도 안 하고 어찌 쓰레기장까지 들고 간단 말인가? 불과 삼십 분 전에 손 공구들을 다 버리고, 전동 드릴로 분해하려고 했더니 드릴이 들어가지 않더라는 것. 망연자실해 있는데 아내가 알려준다. ‘관리실에 공구 있을 거야.’ 응?


난 굉장히 긴 기간 동안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뭐 주택이라고 엄청 삐까뻔쩍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서울 외곽에 다닥다닥 단독주택 촌이었다. 응팔에 나오는 동네 같은 곳인데, 그런 동네 끝물 세대라고 보면 된다. 하여간 주택에 살다 보니 아파트의 관리실에 그런 엄청난 도움의 손길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관리실에 전화해 보니 공구가 다 있었다!! 그걸 이제야 알다니! 내일 이사 나가는데. 모레 출국인데…


이제 집이 텅 비었다. 아이는 잠이 들었고, 에어컨도 없이 요란하게 선풍기만 돈다. 가구가 없으니 선풍기 소리마저 울린다.


나 까먹은 거 없지? 이제 정말 다 마무리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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