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8일(이주 619일 차)
며칠 전부터 분위기가 들썩였다. 미국 전역에서 관측할 수 있는 일식. 일부 지역에서는 달이 해를 완전히 가리는 개기일식이란다. 미국 전역을 대각선으로 관통하는 관측 가능지역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이 굉장히 가까웠다. 주변 사람들이 관측을 위한 여행을 계획하는 등 굉장히 분주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물론 굉장히 흥미로운 천문 이벤트이긴 하지만, 대단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가 아니기도 했고, 아내도 아이도 모두 학교를 가는 월요일이기에 대단한 무언가를 할 수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날짜가 다가오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아내의 수업은 휴강이 되었다. 개기일식 관측을 위한 여행을 가는 학생이 너무 많아 수업이 의미 없어졌다며 교수가 내린 결정이었다. 아이의 학교도 휴교다. 부모와 함께 과학적 학습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학교 수업을 가정 교육으로 대체한단다. 갑자기 개기일식이 모든 일상을 멈춰주었다.
아내와 나는 고민했다. 완전한 개기일식을 관측할 수 있는 지역은 우리 지역에서 차로 2시간 거리 정동에 있었다. 가깝진 않지만 모든 것이 다 먼 미국의 지리를 생각하면 그 정도의 거리는 움직이지 못할 거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당일치기 여행에 도전해 볼까도 고민했다. 나쁘지 않은 체험이 될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다. 엄청나게 길이 막힐 거란 정보를 접했다. 두 시간 거리인데 아침 6시에 출발한다는 이야기까지 들린다. 오후 세시에 일식이 일어난다는데, 9시간 전에 움직인다니. 아이가 있는 가족이 움직이기엔 무리다.
그렇다고 셋 다 집에만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학교 안 가는 평일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렇게 하루를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에게 뭔가 기억에 남는 하루가 되게 해 주고 싶었다. 고민하다가 아이의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기로 했다. 아이가 학교에서 단짝처럼 지내는 두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들을 초대하면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이사해서 타운하우스에 살고 있으니, 아이들이 맘 놓고 놀기에도 좋고, (층간소음 걱정이 더 이상 없다!) 일식이 일어나는 위치도 새 집 앞마당에서 보기 좋을 것 같았다. 아이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좋아한다. 아이들 엄마들에게 연락해 봤더니 모두들 흔쾌히 오겠단다. 좋아. 이제 계획 시작이다.
친구들은 한 시부터 다섯 시까지 있기로 했다. 모처럼 친구들을 초대하는 만큼, 실컷 놀다가 가면 좋겠다 싶었다. 오자마자 점심을 먹어야지. 메뉴는 피자다. 역시 미국에선 피자가 만만하고 좋다. 점심을 먹고 나면 방에서 같이 영화를 볼 수 있게 해 줘야지. 한국에서 사 두었다가 창고에 처박혀 있는 빔프로젝터를 오랜만에 꺼냈다. 정말 쓸데없이 샀다고 자책하다가도 이렇게 한 번씩 역할을 톡톡히 한다. 영화는 아이가 보고 싶어 했었는데 극장 개봉 시기를 놓쳤던 디즈니의 100주년 애니메이션 ‘위시’를 보기로 했다. 영화를 보다가 시간이 되면 일식을 관측해야지. 같이 볼 수 있게 관측용 안경도 미리 구매했다. 같이 앉아서 관측도 하고 간식도 먹을 수 있게 앞마당을 준비했다. 알차고 신나는 오후가 되겠지?
아이는 너무 신나고 기대가 됐는지 밤새 뒤척였다. 친구를 집에 초대하는 게 워낙 오랜만이기도 하고, 더군다나 자신이 너무 만족해하는 새 집으로 친구들이 온다는 사실에 신이 난 모양이다. 귀여운 녀석!
준비는 계획대로 척척 이루어졌다. 아침부터 집안 청소를 하고 아이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혹시 강아지 냄새가 너무 지독할까 봐 제법 쌀쌀한 날씨에도 환기를 힘들게 하고 공기청정제도 뿌렸다. 미리 준비한 일회용 식기를 세팅하고 미리 주문한 피자도 픽업해 왔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신나게 놀기만 하면 된다.
아이가 초조해하는 사이, 친구들이 집에 도착했다. 열한 살 여자아이 세 명이 모이자 집안은 수다 소리가 가득 메워진다. 반려견 디디는 아이들의 소리에 놀라 연신 짖어댄다. 나도 당황스럽다. 지금까지는 친구들이 와도 이 정돈 아니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어렸을 땐 자기들끼리 주도적으로 놀지는 않게 된다. 부모들이 준비도 해줘야 하고, 같이 놀아주기도 해야 한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들. 그야말로 폭풍수다에 비명소리가 온 집을 울린다. 시끄러운 수다 소리가 놀랍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 좋다. 아이들이 즐겁다는 증거니까.
폭풍 같은 점심 식사가 끝나고 아이들은 영화를 보러 아이 방으로 올라갔다. 나와 아내는 아래층에서 있는데, 영화를 보는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쿵쾅거린다. 상관없다. 층간 소음이 다른 집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나와 아내는 뭔가 흡족한 기분으로 가끔 앞마당에 나와 일식을 확인한다. 달이 해를 가리는 현상은 거의 세 시간에 걸쳐 이뤄지는데, 벌써 달이 태양을 절반 가까이 가렸다. 이제 아이들을 불러 일식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아이들의 폭풍 수다는 앞마당에서도 이어진다. 사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이 일식에 얼마나 관심이 있겠는가? 일식 자체보단 같이 모여서 놀 수 있단 것에 더 신나겠지. 한 십여 분 일식을 보면서 신기해하더니 어느새 지들끼리 수다 떨고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놀기에 바쁘다. 재미있었던 건 아이들이 케이팝을 틀어놓고 춤추고 놀더란 거다.
그렇게 한참을 더 놀던 아이들은 다섯 시가 넘어서 픽업을 온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들이 돌아간 후 아이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그저 집에 있는 또 하루가 되고 말았을 날. 그 의미도 분명하지 않은 일식이 어쩌니 저쩌니 하고 말았을 시간. 그래도 친구들을 초대해서 함께 논 덕분에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다음부턴 조금 더 자주 친구들을 초대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친구들을 초대한다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 번거로운 것들이 많다.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 집을 드나들던 우리의 어린 시절과는 차원이 다르다. 부모들과 약속도 잡아야 하고, 먹을 것도 챙겨주고, 안전에 관해 신경 쓸 일도 많다. 너무 각 잡고 파티를 매번 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은 캐주얼하게 친구와 함께 보낼 시간을 많이 만들어줘야겠다 다짐한다.
완전히 달이 해를 가렸던 개기일식만큼이나 완전한 하루였다. 이런 날은 아무리 준비가 힘들고, 신경 쓸 일이 많았더라도 만족함이 크다. 이런 마음이 부모의 마음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