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5일(이주 616일 차)
그야말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들판에는 풀들이 자라나고 나무에도 새순이 돋는다. 이곳은 한국과 자라는 식물들이 비슷해서 개나리 꽃도 피어난다. 미국 사람들도 벚꽃을 좋아해서 봄이 되면 벚꽃도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추운 겨울도 이젠 안녕이다.
…
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봄이 왔지만 봄이 오지 않았다. 여기는 미국의 미드웨스트다. 안타깝게도 그렇다. 같은 주의 동쪽 끝 도시는 완연한 봄이 왔다 하는데, 우리의 봄은 아직도 왔다 갔다 한다. 이곳의 환절기는 정말 변덕스러울 지경이다.
벌써 낮기온 20도에 달하는 날을 맞은 것이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이사 준비를 하던 어느 날이었는데, 파티오 정리를 하다가 땀범벅이 됐더랬다. 이제 정말 봄이 오는구나 하면서 굽어진 어깨를 펴리라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3월에도 눈을 맞았다. 그러다 또 더운 날을 맞는다. 지난주에 차를 정비소에 맡기고 돌아오는 길엔 십여 분 걸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땀으로 젖었다. 이젠 정말 봄인가 착각하려던 찰나, 오늘은 또 눈이 온다.
도대체 저 새순을 드러낸 나무들이, 언덕을 가득 메운 개나리가, 교정을 드리운 벚꽃들이 어떻게 계절을 눈치챘는지 납득이 되질 않는다. 아직도 이렇게 추운데 너는 도대체 어떻게 알고 나온 거니? 그러고 보니 캘리포니아에 살 때도 그렇다. 샌프란시스코가 있는 북캘리포니아는 여름에도 겨울에도 15도에서 25도 사이를 오가는 온화하지만 서늘한 날씨를 유지하기 때문에 환절기랄게 전혀 없는데도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낙엽을 내었다. 그렇다면 이곳의 너희들도 인간이 느끼지도 못하는 그 변화를 눈치챘겠구나.
새로 이사 온 집의 1층은 반지하에 가깝기에 엄청 춥다. (입구는 1층이지만 언덕에 집 반이 파묻혀 있는 형태다. 그래서 2층에서도 지층이다) 그래서 그런지 떠날 듯 떠날 듯 괴롭히는 겨울이 얄밉다. 아내와 아이의 책상은 모두 따뜻한 2층 방에 있어서 괜찮지만, 나의 책상과 작업 공간은 모두 1층이다. 뼛속까지 미어져 들어오는 꽃샘추위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담요 속에만 파고들고 싶다.
타운홈으로 이사 오고 나서 봄이 되면 뒷마당이나 앞마당에 텃밭도 가꾸고, 야외공간도 꾸미고 싶었는데, 한 달이 넘도록 아무것도 시작 못하고 있다. 홈디포나 로우스와 같은 가드닝 용품을 파는 곳은 한창 사람이 북적이지만, 몇몇 추운 기후에서 잘 자라는 꽃들을 제외하고는 아직 작물을 심을 기후는 아니다. 씨앗 패키지 뒷면을 보면 미국 지도에 언제 심을 수 있는지 등고선처럼 표시돼 있는데, 우리 지역은 5월이나 돼야 뭐든 심을 수 있다 표시되어 있다. 그래서 이것저것 심고 싶은 것이 있어도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초여름의 한낮처럼 더운 날씨와 늦겨울의 이른 아침처럼 추운 날이 2~3일 간격으로 반복되다 보니, 어떤 활동을 위한 계획을 세우기가 어렵다. 옷도 여름옷은 꺼내야 하고, 겨울옷은 아직 넣으면 안 된다. 아이의 친구들만 봐도 어떤 친구는 패딩을 입고 나오고, 어떤 친구는 반바지 차림이다. 한국에서처럼 그저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어떤 날은 하루종일 보일러를 틀다가 어떤 날은 에어컨이 필요하기도 하다. 작년 한 번 경험해 본 것만 가지고는 적응이 쉬 될 리가 없다.
길게 보면 6개월간 겨울이 지속되는 미드웨스트 지역. 그러니 봄이 더 간절하다. 봄만 되고 여름만 되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기후. 아이들이 운동하면서 놀기도 좋고, 그저 자리 깔고 앉아서 햇살을 즐기기만 해도 좋다. 가을만 돼도 온 산을 뒤덮은 단풍이 한국의 내장산 못잖다. 하지만 겨울은 모든 것들을 멈추게 한다. 단 6개월을 즐기기 위해, 나머지 6개월을 견딘다.
이제 그 경계선에 거의 다 왔다. 일기예보를 보니 다음 주부턴 영하로 떨어지는 기온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이젠 봄을 맞이할 준비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긴 겨울도 지나간다. 순이 돋고 움이 튼다. 이제 봄이다. 비록 오늘은 눈이 오지만.
사진: Unsplash의Aubrey Od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