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신생아 태를 갓 벗은 4개월 차. 남편과 나는 부모로서의 삶에 슬슬 익숙해지고, 분유 수유가 하루 4~5회로 줄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아기가 가끔 8시간 통잠을 내리 자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우리가 이제야 티끌만 한 안정을 맛보려던 그때, 소아과에서 이유식을 시작해 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활활 타는 지옥문의 '어서 오라'는 손짓인 줄도 모르고, 나는 그저 기대감에 부풀었다. 분유 말고 다른 음식을 맛보는 우리 아기 첫 반응은 어떨까, 그게 얼마나 또 귀여울까 하는 생각도 들고,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 자랑스럽기도 했다.
"작은 병에 든 퓨레(갈아 만든 음식)를 사다가, 평일 오전에 한 가지씩만 먹이세요."
첫 이유식을 시작할 때 소아과 의사의 조언이다. 아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는지 차례로 시험해 보는 것이었다. 평일 오전에 하라는 이유는, 응급실에 갈 상황에 대비해서였다.
우리 아기가 가장 처음 먹은 이유식은 사과 퓨레 두 숟가락이다. 아기새처럼 입을 짝짝 벌리며 잘도 받아먹는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새콤달콤한 음식 맛에 놀라 눈이 동그래진 모습이 퍽 깜찍했다. 우리 아기는 몇 달간 다양한 과일과 채소 퓨레를 맛보았고, 큰 문제는 없었다.
한국에서는 이유식을 할 때 묽은 쌀미음부터 시작해서, 점점 다양한 재료를 섞고 농도를 높인다고 알고 있다. 초기, 중기, 후기 이유식으로 나뉜다고 들었던 것 같다.
반면 내가 그때껏 미국에서 본 아기들은, 주로 퓨레와 귀리죽(오트밀)을 이유식으로 먹었다. 작게 잘라 손으로 집어먹기 쉬운 '핑거 푸드'도 많이들 먹는다. 빵, 채소, 고기 완자 등, 핑거 푸드의 종류는 다양하다. 이가 몇 개 없어도 잘 먹는 아기들을 보고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아기가 생기며 이유식은 당장 눈앞에 닥친 내 일이 되었다. 여러 생각 끝에 한국식보다는 미국식 이유식을 먹이는 것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첫째, 내가 사는 곳은 미국이다. 미국에서는 미국식 음식 재료를 구하기가 더 쉽고, 가격이 저렴하며 신선하다. 이 상황에서 나는 미국식 이유식을 주로 먹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봤다. 물론 엄마가 한국인이니, 내 아기가 한국 요리를 접할 기회는 다른 미국 아이들보다 월등히 높기는 할 테지만 말이다.
둘째, 한국식 이유식을 하려면 쌀을 매 끼니마다 먹여야 한다. 한데 미국 소아과협회에서는 아기에게 "쌀을 포함한 음식은 제한적으로 주도록" 지침이 내려와 있다. 미국 땅에서 재배한 쌀에 고농도로 함유된 비소의 위험성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집에서는 비소 함량이 낮은 태국산 자스민 쌀만 사 먹는다. 나에게 쌀 이유식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면 그 자스민 쌀을 갈아서 쌀죽을 만들 수도 있었고, 한국 땅에서 재배한 쌀을 인터넷에서 주문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셋째, 아기가 죽의 질감 말고도 다양한 식감을 접해야, 먹는 행동에 더 재미를 느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기가 온갖 음식을 만지고 깨물고 씹는 경험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아기가 더 즐거울 것 같았다.
생후 6개월에 가까워지며, 한국 엄마의 미국식 이유식 만들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이유식을 하루에 한 끼만 주다가, 시간이 흐르며 분유량과 낮잠 횟수가 줄 때마다 이유식 횟수를 늘렸다. 메뉴는 거의 이런 식이었다.
아침: 오트밀 혹은 요거트나 퓨레, 과일
점심: 퓨레, 빵 혹은 파스타, 치즈
저녁: 빵이나 주먹밥, 파스타, 두부나 고기 완자 등의 단백질 식품, 채소 스틱
위의 메뉴대로만 100% 먹인 것은 아니다. 우리 부부가 외식하거나 포장 음식을 먹을 때는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에 한해 아기도 같이 나눠 먹었다. 시판 배달 이유식도 종종 주문해서 먹였다.
미국 오트밀 역시 미국 쌀만큼은 아니지만 비소 함량이 꽤 되기에, 포장에 쓰인 아기 권장량을 항상 지켜서 만들었다.
핑거푸드는 목에 걸리지 않게 작고 길쭉하게 잘라 주면 된다. 나조차 잘 안 먹는 생당근이나 셀러리 스틱을 아기가 만족스럽게 갉아먹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웃음이 나왔다. 이갈이 하는 토끼나 햄스터 같다. 실제로 단단한 채소 스틱을 갉작이면, 이앓이 하는 아기 입장에서는 시원함을 느낀다고 한다.
생두부나 삶은 달걀도 그냥 적당하게 잘라 주면 곧잘 집어먹었다. 달걀은 계란절단기를 사용하면 1초 안에 얇게 자를 수 있어 편리했다. 아무 간도 안 한 음식들인데 아기가 몹시 맛있게 먹어서 신통방통했다.
미국에선 아기용 치즈를 따로 팔지 않는다. 많이 안 짜고, 저온 살균(pasteurized)된 치즈라면 그게 아기용이다. 집 근처 마트에서 프레쉬 모차렐라 치즈 덩어리를 사서 쓱쓱 잘라 주면 완벽한 핑거푸드가 된다. 코티지 치즈, 리코타 치즈, 스위스 치즈 등도 아기에게 추천되는 종류다.
참고로 베이비 스위스(baby Swiss) 치즈는 스위스 치즈와 유사하나, 전체적인 크기가 작아서 이름에 베이비가 붙었다고 한다. 딱히 아기용으로 나온 치즈는 아니지만, 아기들도 먹을 수 있다.
단, 브리 치즈나 까망베르, 고르곤졸라 치즈 등은 저온 살균되지 않아 아기에게 권장되지 않는다.
아기에게 핑거푸드를 주면서, 목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긴 했다. 남편과 나는 아기를 먹일 때 항상 붙어 앉아서 주시했고, 영유아 하임리히법을 배워 와서 때때로 잊어버리지 않도록 연습했다. 우리 아기는 양배추를 처음 먹었을 때 잘 못 넘겨서 좀 켁켁댔지만, 다행히 음식이 목에 걸리는 사고는 없었다.
평소에 미국 아기들이 자유롭게 핑거푸드를 집어먹는 모습을 종종 봤기에, 나도 자연스럽게 미국식 이유식을 선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한국에서 출산하고 아기를 키웠으면 당연하게 쌀미음 이유식부터 출발하지 않았을까? 주위에서 보고 듣는 게 있으니 분명 영향을 받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한국에서 살면서 미국식 이유식을 한다고 했으면, 좀 유별나단 얘기를 듣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특히 가족이나 친척 어른들은 "뭐? 8개월 된 아기한테 뭘 준다고?!" 하며 충격받을 수도 있겠다.
모르겠다. 내가 한국을 떠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한국은 내 생각과는 다른 분위기일 수도 있다. 미국식 이유식 방법과 비슷한 '자기 주도 이유식'이 한국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방법과 메뉴는 좀 달라도, 내가 한 것도 자기 주도 이유식의 일종일 것이다. 의외로 평범하게 받아들여졌을 가능성도 있다.
내가 했던 '자기 주도적 미국식 이유식'은 나의 육아관에 잘 맞는 방식이었고, 다시 돌아가도 그것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육아에서 쉬웠던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이유식은 특히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아기도 잘 먹었고, 별 탈 없이 지나갔다면서, 갑자기 왜 분위기가 싸해지지? 하고 독자들은 의문을 가지겠지만, 이 부분 없이는 나의 이유식 역사를 논할 수 없다.
아기는 무탈했으나, 탈 난 사람이 하나 있긴 했다.
바로 이유식 지옥에 갇힌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