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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시 Aug 05. 2023

미국 출산으로 정했다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국에 와서 아이를 낳을 거야?” 내가 임신 사실을 알릴 때 지인들에게 가끔 들었던 질문이다. 해외에 사는 임신부라면 이 문제로 한 번쯤 고민해 봤을 것이다.


    한국에서 아이를 낳으면 편한 점이 많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라 친숙하다. 의료진과의 대화가 막힘 없이 원활하다. 발달된 산후조리 문화와 입맛에 딱 맞는 식사 등, 그 장점은 헤아릴 수 없겠다. 출산 직후에 내 가족과 친구들에 둘러싸여 축하받는 모습 또한 동경하지 않은 바는 아니다. 하지만 몇 가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들이 내 발을 잡았다.      


    해외 거주자의 입장에서, 한국은 얼핏 쉽고 편한 공간으로만 여겨진다. 그것은 바람일 뿐 실상은 다르다. 나는 독립해서 이미 해외에 새로운 둥지를 꾸렸다. 부모님 댁에 가면 나를 반겨주시겠지만, 나는 이제 손님의 입장이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내 방에 가도, 그 방은 더 이상 내 방이 아니다. 결혼해서도 본가를 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나는 아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원래 손님맞이를 편하게 여기는 분들이 아니다. 나도 그런 성격이라 이해가 너무 잘 된다.      


    아주 큰 상상력을 발휘하여, 부모님이 큰 결심을 해서 내가 본가에서 출산하기를 원한다면? 신생아 육아를 도와주신다는 제안을 준다고 한다면 어떨까. 마음이 많이 흔들리겠지만 결국은 사양했을 것이다. 서로에게 부담이 될 게 뻔한 길을 굳이 걸어가서 마음고생할 필요는 없다.     


    나는 아직 과거의 응어리를 부모님께 조심스럽게 하나씩 꺼내며 풀어내는 중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부모님은 기뻐하시겠지. 나름대로 도와주고 싶어 하시겠지. 그러나 아기가 태어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다. 나와 삐걱대는 부분들, 무심결에 상처 주는 부분들은 여전할 것이다. 이제까지의 방식 그대로.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바로 그곳에서, 나는 해결되지 않은 내 과거를 끌어안고 고마움, 분노, 미안함, 서러움 등의 양가감정에 몸부림치겠지. 거기에 내 임신 출산 호르몬이 빚어낼 뾰족한 언어들이 미사일처럼 쏘아진다면? 나와 부모님과의 관계는 더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망가질 수도 있다. 그러고 싶지 않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나는 부모님과 잘 지내보고 싶다.  


    그러려면 우리에게는 일정한 거리 유지가 필요하다. 내 아이를 처음 만난 특별한 시간이, 부모님과 나의 관계에 밀려 뒷전이 될 수는 없었다. 내 한 몸 추스르고 아이 보는 것만도 바쁠 테다. 엉뚱한 곳에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동물들도 본능적으로 가장 편하고 안전한 곳을 찾아 새끼를 낳는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안정을 느끼는 곳은 어디인가? 미국에 있는 우리 집이다. 같이 있을 때 제일 편한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 남편이다. 따라서 '우리 집에서 남편과 둘이 아기를 낳아 돌본다.'가 가장 나에게 맞다는 결론이 나왔다.       




    긴 여행을 버틸 기운이 모자란 것도 타지 출산의 이유 중 하나였다. 의학적으로 나는 35세 이상의 고령 임산부였다. 완전 전치태반 소견까지 있어서, 여행 중 언제든 위급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전치태반이라도 크게 무리만 안 하는 선에서 일상생활을 계속하기를 권장한다. 열댓 시간의 비행기 여행이 일상생활에 포함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평범한 여행을 훌쩍 넘어선 고행이다.


    게다가 돌아올 때는 갓 출산한 몸으로 신생아와 아기용품들을 이고 지고 와야 한다. 과연 그게 철인 3종 경기 수준의 험난한 도전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비행기 여행 중의 나 자신을 너무나 잘 안다. 소음과 인기척에 예민해 비행기 안에서 잠을 거의 못 잔다. 소화도 안 되고 배가 찌릿찌릿 아프며, 빵빵하게 부풀 정도로 가스가 찬다. 15시간 동안 못 먹고 못 자는 극한 상황이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입술에 물집이 맺힌다. 단순포진이다. 국물 음식을 나눠 먹는 관습이 있는 한국에서는 흔하다. 환부에 작열감이 들고 꽤 아픈데, 열흘 정도면 가라앉는다. 어른에겐 좀 귀찮을 뿐, 별 것 아닌 질환이다. 다만, 신생아에게 전염되면 위험하다. 유증상일 때 신생아에게 뽀뽀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바이러스가 신생아의 얼굴에 묻어 옮으면 치명적인 해를 입힐 수 있다. 내 성격상 나는 극도로 조심할 테지만, 그래서 별일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안 그래도 신경 쓸 일 천지인데 물집까지 조심하느라 기진맥진 늘어질 것이다.


    그만큼 한국행 비행기 여행이 내게 주는 정신적, 신체적 소모감이 굉장하다.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한국에서 아기를 낳고 생후 몇 주 만에 미국으로 돌아왔다는 글을 읽으면 진심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그 정신력과 체력에 기립박수를 쳐 주고 싶다.




    이렇듯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좀 과할 정도로 깊이 돌아보며 타지 출산의 이유를 정리했으나, 출산을 몇 달 앞두고 이 나라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상륙했다. 결과적으로는 한국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고 나니 청개구리처럼 또 기분이 아쉽고 오묘했다. 정말 나 혼자 해야 하는구나. 그래도 그 선택을 내가 먼저 했다는 사실이 약간의 위로가 되었다.


    산달이 가까워지며, 미국에서도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었다. 병원에 보호자 출입이 금지되었다. 매달 나 혼자 초음파를 보고 의사와 상담했다. 


    아이가 전치태반에 역아라서, 나는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했다. 다행히 남편이 수술실에 오는 것은 허락되었다. 너무나도 안심이 되었다. 타지 출산인데 수술실에서마저 혼자라면 너무 외롭고 힘들 것 같았다.


    그렇다. 이제 곧 온다, 남편과 내가 단둘이 돌볼 우리 아기가. 타지 육아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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