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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시 Aug 04. 2023

타지 임신부의 입덧약

상자 밖에서 생각하다

    임신 5주 차에 심한 입덧이 시작되었다. 증상을 호소하자 산부인과에서 *디클레지스라는 입덧약을 추천해 주었다.


    미국 파마시 테크니션 자격증 시험에는 아주 기초적인 약학 영역도 포함되어 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약국에서 근무 중이던 나는, 입덧약이 임산부에게 괜찮다는 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80년대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삼십 여 년간 임신부에 대해 들어왔던 말들이, 나도 모르게 내 무의식에 두텁게 장착되어 있었다. “임신부는 약을 먹으면 안 된다.”도 그중 하나다. 그 때문에 막상 내가 입덧약을 받을 상황이 되자, 속에서 미심쩍음이 슬쩍 올라왔다. 정말로, 약을 먹어도 될까 싶었다. 이런 걸로 고민하는 내 모습에 나도 놀랐다.

 

    하지만 지금 무척 메스껍고 힘든데. 안 먹는 게 최선일까? 솔직히 입덧약을 먹고 싶었다. 단지 마음에 미묘한 거리낌이 있었다. 입덧약을 먹으려면, 내 안에 굳게 자리 잡은 고정관념에 반박을 해야 했다. '그 약이 정말 위험한가? 먹지 않는 경우 대안은 있는가? 무엇이 진정 아기를 위한 일일까?' 짧지만 치열한 과정이었다.


    만약에 내가 한국에서 임신했다면 어땠을까? 입덧약이 아기에게 위험할 수 있다거나, 약을 먹느니 차라리 집에서 쉬라는 말이 주변 사람들 입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 주위 환경과 분위기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다. 아마 나도 그런 말을 몇 번 듣다 보면 귀가 솔깃해져서 “그래, 아무래도 아기를 위해 조심하는 게 좋겠지.” 하며 직장을 그만뒀을 수도 있다. 아니면 끙끙 앓으면서도 입덧을 그저 견디고만 있었을지도 모른다.


    타지에서 임신했기에 입덧약의 장점부터 먼저 바라볼 수 있었다. 직장인으로서, 근무 시간에 잘 버틸 수 있도록 괜찮은 몸 상태를 만들어 준다는 점을 높게 쳤다. 내가 자란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막연히 알고 있던 상식 테두리 밖에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나는 디클레지스의 구성 성분부터 효과, 부작용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 공부했다. 산부인과 의사와도 충분히 상의를 해서, 입덧약을 복용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약을 받아오면서 약사와도 다시 한번 상담을 하며 마음에 평화를 얻었다. 동글동글한 약 표면에 배가 볼록한 임산부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는 입덧약의 복용 결과는 좋았다. 내 삶의 질이 올라갔다.


    이 약의 부작용은 졸음이 오는 것이다. 첫날에 일부러 밤에 먹고 잤는데도, 다음날 아침에 너무 어지럽고 졸려 힘들었다. 매일 먹으며 적응해 가면서 점차 졸음을 덜 느꼈다. 


    입덧약을 먹었다고 해서 몸이 싹 낫는 것은 아니다. 입덧 증상을 반으로 줄여주는 정도다. 여전히 어지럽고 메슥거렸다. 그래도 그만하면 극락이었다. 입덧약이 없었다면 절대 임신 8개월까지 출근하지 못했다. 참 고마운 존재다.




    입덧약을 먹은 나는, “임신 중에 아파도 약 한 번 입에 안 댔다. 아기를 위해 참고 견뎠다” 는 식의 모성애 미담의 주인공은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다. 솔직히 주인공 시켜준대도 내가 사양한다. 임신부에게 무해한 약이 많이 알려진 지금, 약을 먹고 안 먹고는 개인의 선택이다. 엉뚱하게 모성애를 갖다 댈 부분이 아니다. 


    내 생각에 저 미담은 의약분업 이전에 약물 오남용이 심할 때, 혹은 인터넷 발명 이전에 임신부에게 안전한 약물의 정보가 일반인에게 홍보되지 않았을 때에나 감동적으로 들렸던 옛날 상식이라고 여겨진다. 발전된 21세기를 사는 임신부에게는 새로운 상식이 필요하다.      


“임신 중에 아프면 꼭 의사와 상의한다,”

“약이 필요하면 임신부에게 안전한 약을 의사에게 처방받아 먹는다,”

“엄마가 건강해야 아기도 건강하다.”

“불안감 등의 이유로 약을 안 먹는 게 당신의 선택이라면, 그것도 존중한다.”     


    만약 타지에서 외롭게 고민하는 임신부가 나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꼭 위와 같이 말해 주고 싶다. 본인의 판단과 선택에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또한. (그러나 본인이 질문하지 않으면 굳이 오지랖을 부리지는 않겠다.)


    이렇게 우리는,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임신 상식과 임신 문화를 만들어 간다. 타지에서 우리는 외롭다. 도움의 손길이 멀다. 그렇기에 더 독립적이다. 혼자 다 해 나가야 하기에 전문가와 상의하고, 자료를 찾아 공부하고 확인하는 것이 일상이다. 우리는 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부모가 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Diclegis, 독실라민과 비타민B6가 각각 10mg씩 들어있다. 한국 상표명 디클렉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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