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다니는 김대리
지하철 문이 '삑' 소리를 내며 닫혔다. 유리문에 비친 내 얼굴은 퇴근길의 찌든 피로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 무거운 풍경 위로, 맞은편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광고판이 보였다. 야구선수 이대호, 그는 활짝 웃고 있었다.
'살아봐야 아는 인생 야구'
그의 웃음은 왠지 모르게 비장해 보였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그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듯한 광고 문구는 내 마음을 쿵 하고 때렸다. 그래, 저 사람은 정말 살아봐야 아는 인생을 살았지.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숱한 기록을 남겼으며, 은퇴식에선 모두의 박수와 눈물을 받았다. 그의 삶은 한 편의 위대한 서사시였다.
그리고, 나는.
나는 삼십 대 초반, 딱히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고, 인턴을 전전하며 겨우 들어간 회사에서 벌써 5년째 일하고 있다. 월급은 통장을 스쳐 지나가고, 내 이름 석 자로 된 집 한 채는커녕 전셋집을 구하는 것도 버겁다. '내 집 마련'이라는 꿈은 너무 멀리 있어 쳐다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아마 나 같은 사람이 이 시대에 수두룩할 것이다. 뉴스에서는 '영끌'이니, '벼락거지'니 하는 말들이 쏟아진다. 남들은 모두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것 같은데, 나는 멈춰 서 있는 기분이다. 친구의 SNS에는 근사한 집들이 사진이 올라오고, 동기 결혼 소식과 함께 태어난 아기 사진이 뜬다. 모두들 각자의 삶의 스테이지를 차곡차곡 밟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자꾸만 제자리걸음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대호 선수의 광고를 보며,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과연 잘 살 자격이 있을까?'
이대호 선수는 그럴 자격이 충분해 보였다. 그는 자신의 분야에서 정점에 섰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다 할 성과도 없고,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지도 못하는 평범한 존재일 뿐이다. 어쩌면 나는 윤택한 삶을 누릴 자격이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주인공인 삶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이대호 선수의 광고를 보며, 나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를 인정하듯, 이렇게 살고 있는 나 자신에게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 나는 이렇게 살고 있지. 이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
우리는 흔히 인생을 '경쟁'이라고 생각한다. 남보다 더 빨리, 더 높이 올라가야 성공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자꾸만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린다. 하지만 삶은 마라톤이 아니라, 각자 다른 길을 걷는 여행과도 같다.
내 친구 재민이는 삼십 대 중반에 직장을 그만두고 작은 카페를 차렸다. 처음에는 불안해했지만,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을 찾았다. 돈은 많이 벌지 못해도, 그는 매일 아침 웃으며 카페 문을 연다. 재민이에게는 '윤택한 삶'이 곧 '만족스러운 일'인 것이다.
또 다른 친구 지영이는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며 매년 해외여행을 간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즐기며,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그녀에게는 '윤택한 삶'이 곧 '자유로운 삶'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윤택한 삶'은 무엇일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답은 이대호 선수의 커리어 속에도, 친구들의 삶 속에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답은 오직 내 안에 있다.
가장 소중한 자격, '살아갈 자격'
우리는 삶의 주체로서 이미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숨을 쉬고, 웃고, 울고, 고민하는 모든 순간이 그 자격을 증명한다. 이대호 선수가 위대한 야구선수가 되기 위해 수많은 땀을 흘렸듯,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낸다.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끝없이 쏟아지는 업무에 시달리고,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 모든 과정이 바로 우리 삶이다. 그 삶은 다른 누구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서사시다.
그러니 이제는 '자격'이라는 잣대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보듬어줄 때다. 당신이 밥얼 먹고, 잠을 자고,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이 모든 순간이 당신이 살아갈 자격을 이미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내일도 다시 지하철을 타고 출근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대호 선수의 광고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일의 나는 오늘과는 조금 다를 것이다. 그의 빛나는 커리어를 부러워하기보다는, 그의 웃음을 보며 나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나도 내 인생의 주인공이지. 충분히 괜찮아
당신 삶은 이미 그 자체로 빛나고 있다. 당신은 이미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 바로, 당신의 삶을 살고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