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내 여유야
출근길, 매일 같은 시간에 타는 지하철.
앞칸 네 번째 칸, 맨 끝자리.
등을 기댈 수 있는 좋은 자리다. 그래서 좋다.
덜컹덜컹 울리는 바퀴소리와 정거장 안내 음성이 일정한 간격으로 귓속을 파고든다.
그에게 이 시간은 오늘 하루를 상상하고, 마음을 정돈하는 유일한 여백이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수십 가지 상황이 떠오른다.
갑작스런 긴급회의, 고객사 피드백, 이사님의 뜬금없는 호출, 어제 올린 보고서의 수정 요청...
그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린다.
"오늘도 예상치 못한 메일이 올 거야. 놀라지 말자."
이 말은 주문이다.
예고 없는 일에 감정을 쓰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기대보다 준비를 우선하겠다는 자기 암시.
9시 정각, 컴퓨터를 켠다.
모니터에 빛이 켜지자마자 도착한 메일 하나.
제목에 [긴급]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다.
팀장님의 메일이다.
오전에 마무리하려던 보고서가 오후까지 연기되고,
대신 오전 중에 고객사 자료를 정리해 달란다.
마감이 미뤄졌으니 좋은 일일까?
아니다.
그는 알았다. 이 자료 하나가 오늘의 모든 흐름을 바꿀 것이라는 것을.
어제까지 계획했던 일정은 물거품이 된다.
한숨은 속으로만 쉰다.
곧장 체크리스트를 수정한다.
고객사 요청 자료는 11시까지다.
팀 회의는 2시로 미뤄야 하니, 민지에게 먼저 연락한다.
원래 오후 미팅 자료는 저녁에라도 마무리하자는 생각이다.
혼돈 속에서도 그가 붙잡는 건, 우선순위와 시간표다.
같은 팀에 있는 민지는 6년 차 대리다.
그는 민지에게서 일하는 태도를 많이 배웠다.
완벽하려 하기보다, 당황하지 않을 준비를 하는 사람.
민지는 회의 전에 항상 "나 오늘 좀 버벅일 수도 있어요"라며 웃는다.
그 말이 그의 마음을 자주 편하게 만든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
실수해도 괜찮다는 일종의 동의.
민지는 늘 준비를 많이 하지만, 그 준비는 자신감보다도 평정심을 위한 것이다.
그는 그녀의 비밀을 하나 눈치챘다.
민지는 언제나 발표 전날 밤, 노트에 예측 질문을 메모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키워드만 정리해 둔다.
"답변이 완벽하지 않아도, 맥락은 틀리지 않게 하려는 거죠."
민지가 그에게 했던 말이다.
그도 언젠가부터 따라 하기 시작했다.
회의 전날 밤, 10분 동안 질문을 뽑아보는 시간.
어쩌면 그 10분이 다음날의 '내 안의 당황'을 30% 줄여주는지도 모른다.
회식 자리에서, 새로 들어온 주임이 물었다.
"선배는 왜 항상 업무 마감일보다 하루 전을 목표로 해요? 너무 빡세게 사는 거 아니에요?"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내 여유야."
다른 사람들은 오늘을 위해 오늘을 쓴다.
그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준비한다.
이 삶의 차이는 당장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메일 하나, 일정 하나 어긋나는 순간,
누가 더 덜 흔들리는지를 보면 바로 드러난다.
그는 요즘 자기 관리에 신경을 쓴다.
이유는 간단하다.
"회사를 오래 다니려면, 내 몸과 마음이 회사보다 오래 버텨야 하니까."
월요일 아침엔 꼭 눈이 부은 채 출근하고,
수요일쯤이면 커피 대신 레몬수를 마신다.
금요일엔 자정 전에 무조건 잔다.
어떤 날은 멍하게 앉아 있다가 "왜 이렇게 피곤하지?" 중얼거리는데,
옆자리 선배가 그랬다.
"오늘 네 몸이 말을 안 듣는 날인 거지. 어쩔 수 없어. 그러니까 최소한 오늘만은 자기편 좀 들어줘."
그 말이 위로가 됐다.
그는 이제 자기 컨디션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수면 시간, 아침 기분, 점심 식사, 스트레스 지수.
몸의 언어를 미리 읽는 것이야말로 직장인에게 가장 필요한 감각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하루의 끝,
그는 오늘도 무언가를 놓쳤고, 무언가를 겨우 붙잡았다.
회의에서 실수한 동료의 말을 대신 정리해주기도 했고,
엉뚱한 요청을 보낸 상사의 말은 조용히 무시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이 생활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결국 살아남는 건,
항상 정답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질문에도 너무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그는 안다.
그래서 오늘도 다짐한다.
"나는 오늘도 흔들릴 수 있다. 하지만 흔들리는 와중에도 완전히 쓰러지지 않도록,
내 안의 경우의 수를 하나씩 줄여나가자."
직장에서의 '잘함'은 완벽함이 아니다.
상황이 변할 때 덜 흔들리는 것, 감정이 요동칠 때 중심을 잡는 것.
그게 진짜 프로다.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면, 마음은 너무 피곤해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수한 경우의 수 중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씩 지워가는 것.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내 안의 경우의 수를 줄이며 살아간다.
이게 직장인의 생존 방식이다.
직장인의 여유는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무너졌을 때 덜 흔들릴 준비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