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원우 Jul 15. 2020

[단편소설] 사십 대 민수

중디 이원우

 민수가 손에 들고 있는 캔맥주의 상표를 확인하기 위해 캔을 살짝 돌렸을 때, 끝 마디 하나가 없는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그의 손가락이었다. 끝 마디 가 잘려 있는 검지와 중지는 다른 손가락에 비해 키가 작았으며, 세상에 닳고 닳아 굳은살이 반들반들해져 있었다. 그 두 손가락은 민수보다 더 나이를 먹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민수는 취한 것인지 피곤한 것인지 모르지만 더 이상 맥주의 상표를 확인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직까지 차가움을 잃지 않아 방울방울 냉정한 이슬이 맺혀 있는 맥주 캔 너머로 애월의 항구와 마을의 불빛들이 보였다. 그의 눈이 불빛들에게 아직 초점을 맞추지 않았으므로, 불빛들은 솜사탕처럼 둥글고 풍성한 파스텔 조의 컬러로 서로 부드럽게 붙어서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고 크리스마스트리의 따뜻한 전구를 떠올렸지만, 그날은 아직 시월의 마지막 밤이었다.  

 이내, 그의 눈이 마을의 불빛들에게 초점을 맞추자 거기에는 15년 전의 불빛들이 있었다.
 

 민수는 그날도 회식이 끝나고 흩어진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바닷가 마을과 하늘로 시원하게 트인 이 장소에 왔다. 

  그 날은 민수가 5년 동안 일하던 회사에서의 회식이었다.  민수는 지금까지 회사의 대표였던 박사장에게서 회사를 인수하며 독립적인 자신의 회사를 만들기 위한 자리였다. 그러므로 박사장의 퇴임 송별식이자 민수의 창업 축하 회식이 되는 셈이다.
 

 그 회사는 목공을 중심으로 하는 회사로 가구뿐 아니라 전시부스나 방송세트를 제작하는 회사이다. 민수가 이 회사에 입사할 때는 경력사원이 아닌 수습사원으로 로 채용됐었다. 그는 1년의 수습 시절을 거처 정사원이 되었을 때에도 아직 배워 야할 것이 너무 많아서 5년 내내 한결같이 배움에 대한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고 늘 호기심과 함께 도전적으로 일해왔다. 그것은 일에 대한 남자의 애정이었다. 그 그러므로 그는 일하는 시간을 한 번도 노동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확실히 그는 다른 직원들보다 목공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하루하루 익숙해지고 발전 해 가는 자신의 업무 능력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민수는 그것을 일에 대한 열정의 보상처럼 생각하여 항상 만족했고 어느 날은 심지어 그런 자신에게 감동까지 하였다. 민수에게 이 일이 20대 때부터 동경해 왔던 것이었으므로 하루하루 의 노력과 성과는 매일 다른 색으로 이뤄지는 행복한 꿈과 같았다.


 민수는 특별히 잘하는 취미는 없었으나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가 일을 멈추고 쉴 때 하는 유일한 것이 기타 치며 노래하는 것이었다. 민수는 학생 때부터 친구들과 노래 그룹의 리더로서 활동을 해왔고 그동안 자신이 만든 노래도 많았다. 그의 오래된 작곡 노트는 그의 또 다른 재산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도 일 다음의 것이 되었다.


 박사장은 민수가 입사할 때부터 눈여겨봤는데 그는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에 열정에 빠져있던 자신을 민수에게서 자주 발견하곤 했다. 그래서 민수에 대해 자 신도 모르게 늘 시선이 갔고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 나무라는 재질을 자체를 좋아하며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만들 때의 풍부한 상상력과 정확한 직관력, 그리 고 사업적으로도 민첩하고 단호한 판단력은 다른 직원들에게 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자신과의 동질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수에게서 가족과 같은 친밀감을 느낀 것은 민수의 일에 대 한 적합성 뒤에 깔려있는 따뜻한 감성이었다. 민수의 훈훈함이 깃든 대인관계나 때로 소녀스럽기 까지 한 섬세한 감수성을 발견할 때 박사장의 민수에 대한 친근감은 마치 아버지가 자신을 닮아가는 아들의 대견함에 흡족해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박사장은 특히 민수가 혼자 있는 휴일의 오후, 그의 방 창을 넘어 들려오는 나 나른한 기타 소리에 마음이 끌렸다. 민수가 노래하고 있을 때는 다음날의 중요한 업 무 지시를 해야 할 때라도 그가 노래를 모두 마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곤 했었다 다. 그것은 민수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지나간 젊은 날의 아련한 기 억을 아무렇게나 다루고 싶지 않은 조심성 같은 것이었다. 

  민수의 이런 차분하고 온화한 성격 이야말로 다른 직원들이 보통 일 년 이상 버 티지 못하는 다소 험할 수도 있는 목공 일을 5년간이나 꾸준히 할 수 있었으며, 직원들이나 거래처 사람들과도 한 번의 마찰도 없이 지속할 수 있었던 유연하고 강한 동력이었다는 것을 박사장은 잘 알고 있었다.
 

 민수는 부모의 도움을 받아 회사를 인수하였고 박사장은 누구 보다도 민수가 회 사를 이어가는 것이 가장 합당하고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회사는 박사장이 젊은 시절부터 이끌어 오면서 규모가 커졌지만 그만큼 회사의 부채도 늘어났었다. 또한 최근 박사장의 건강이 위험할 정도로 악화되어 회사를 쉬는 날이 더 많았었다. 

  박사장은 회사를 그만두기 몇 년 전부터 애월의 바닷가 언덕 위에 펜션 건물을 구입하였는데 펜션을 운영하면서 전원생활을 하는 것이 평소 꿈이었다. 그리고 그 꿈에 한발 디딘 셈이다.
 

 민수는 그 회사의 운영자가 되었지만 완전한 독립을 하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려 다. 박사장은 민수에게 그동안 유지해 왔던 모든 거래처들을 하나하나 연결해 주 었고 직원 관리와 자금관리에 대한 경영 노하우도 자세히 알려주었다. 특히 보다 멀리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주었다. 박사장은 자식이 없지만 마치 아들에게 가 업을 전수 하듯 하나하나 세심하고 친밀하게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민수에게 그것들은 이미 그동안 수없이 머리와 몸으로 익혀왔던 것들이라서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민수의 업무능력은 박사장의 예상 이상이었다. 일의 모든 순서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제품이 완성된 후의 모양도 세밀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또한 주요 의뢰자 들의 취향과 최근 유행하는 스타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은 뿐만 아니라 유행을 앞서가는 디자인을 의뢰자들에게 조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회사와 거래하던 의뢰자 들은 모두들 민수가 이전 박사장의 능력을 이미 뛰어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안심하였다. 

  민수도 자신의 능력과 거래처 사람들의 반응에 만족하였고 그것을 지속시키기 위해 예전보다 더욱 일에 전념하였다. 고객들의 제품에 대한 만족과 그에 대한 신뢰와 기대감은 민수에게는 더 할 수 없는 값지고 달콤한 보상이었다.  어떤 날에는 TV에서 자주 보았던 방송국 유명 출연자가 자신에게 인사를 하며 그가 만든 부스의 디자인에 대해 칭찬과 격려를 받았을 때 민수는 흡족함을 넘어 서 감동하였으며 그런 일이 자주 있을수록 그는 자신의 인생이 밝게 빛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민수는 일과가 끝난 저녁에도 특별히 다른 것을 하지는 않았고 가구나 부스 디자인의 새로운 경향 이라든지 새로운 소재, 그리고 새로운 제작방법에 대해 잡지와 인터넷에서 찾아다녔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늘 혁신을 생각했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였다. 

  이렇게 민수는 하루하루, 스스로 진화해 가면서 그의 잠드는 시간은 점점 늦어지게 되었고 잠자는 것을 건너뛰는 날도 빈번해졌다.  그는 그런 자신의 닳아 오른 열정의 온도만큼 직원들에게도 뜨거워지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직원들도 대개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고 민수의 방향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들도 점점 일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나중에는 민수처 럼 업무 시간과 개인 시간의 구분이 없어져갔다. 

 어느 날은 민수와 직원들이 전시 시설에 대한 새로운 제작방식에 대해 늦은 밤까지 회의를 하였는데도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민수의 새로운 디자인에 대한 고집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그것을 직원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회의실 창 밖으로 새어 나오는 흔들리지 않는 불빛은 한밤의 달빛보다 밝았고 달이 산 너머로 들어간 새벽까지 이어졌다. 마당의 백구도 덩달아 잠을 잘 수 없었다. 그 모습은 어쩐지 고3 생들의 단체 야간 학습의 모습과 비슷했고, 사회주의 국가에서 피곤한 일과 후에도 이어지는 체제 학습시간과 같은 모 습의 영화 장면이 연상될 정도였다. 

  직원들은 피곤했지만 그것을 민수에게 표현하지는 않았는데, 만약 민수의 고집과 피곤함을 표현했다면 다 함께 뛰는 릴레이 경주에서 자신의 역부족으로 인해 팀 전체를 뒤쳐지게 하는 것, 혹은 새로운 혁명을 향해 다 같이 전진하는 행렬에 서 혼자만 빠져나와 후에 자아비판대에 오를 것 같은 어이없는 상상에 이르기도 했다.
 
 민수의 회사는 지역에서 점차 인지도와 신뢰도가 높아져갔다. 그에 따라 수주하는 양도 숨 가쁠 정도로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른 회사들보다 열심히, 그 리고 많은 시간을 일했고 마땅히 디자인과 제품의 질이 좋았기 때문에 수금에 있어서도 큰 어려움이 없어서 안정된 자금으로 운영을 할 수 있었다. 직원들에게는 수익에 대한 정직한 배분을 하였고 매년 직원들의 연봉도 일정하게 인상할 수 있었다. 또한 매년 두 차례의 회사 MT는 해외에서 하였다  민수는 직원들의 수당과 복지뿐 아이라 개인적으로도 직원 한 명 한 명과 친밀 한 관계를 유지하여 직원들은 힘든 일상에도 큰 불만은 없었고 오히려 회사 생활을 즐거워했다.  직원들 간에도 사이가 좋아서 쉬는 시간에는 서로 장난을 치거나 대화를 많이 했는데 그 대화 중에는 초창기 민수와 일하면서 적응하는데 힘들었던 점들에 대 해 추억담처럼 얘기하는 비중이 많았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동안의 힘든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서 풍요로운 안정기가 왔다는 것을 실감 하자는 것이었다.
 
 회사는 그동안 여러 가지 설비투자에 대한 자금을 거두어들였고 안정된 운영과 직원들에 대한 복지혜택을 줄 수 있었다. 직원들은 업무환경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그러자 그들에게 조금씩 새로운 직장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일 과 후 술자리였다. 

 전에도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회사에서 야근을 한 후 주로 치맥을 배달시켜 먹었었다. 이제 그들은 그동안의 수많은 야간 체제 학습으로 단련되어서 일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수월해져서 업무에 요령이 생겼다. 그러면서도 전보다 업무능력도 향상되었기에 이제 자아비판 같은 것은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전과 달리 단란주점뿐 아니라 가끔 고급스러운 Bar 같은 곳에서 여유 있게 즐기게 되었고 그 횟수도 점점 잦아졌다.  또한 민수도 그동안 관심도 없었던 동창들 모임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업 초기에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과 그것으로 인한 긴장과 중압감 때문에 동창 회에 대해서 무관심이 라기보다는 피하는 것에 가까웠었다. 그러나 사업이 안정을 찾자 어쩐지 옛 친구들이 보고 싶어 졌다. 친구의 모습이 보고 싶은 것보다는 그들과 자신의 성공을 비교해 보고 싶은 것이 맞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스스로 성공에 대한 척도에 가까워졌다고 믿었고 그렇다면 그것을 옛 친구들에게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 진 것이다. 그래서 몇몇 친한  친구들을 통해 동창회에 참석할 의 사를 간접적으로 전하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자신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후배들을 통해 동창회 체육대회에 많은 금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여 그가 동창회에 나갔을 때 많은 친구들의 관심에 찬 시선을 느꼈고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여러 친구들이 아는 체하였다 민수는 그것이 어색하지도, 싫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모습이 번듯한 동기들 곁으로 다가가서 골프 이야기를 꺼냈고 필드 모임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 후 어느 화창한 일요일에 동기들 중에 골프 친구들과 필드에 갔을 때 그는 운 좋게 몇 번의 버디를 한 적이 있었다. 여자 친구들에게는 환호를 받았고 남자 친구들에게는 엄지척을 받았다. 그리고 민수와 친구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필 드 전체로 퍼져나갔다.   민수는 그러면서 문득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기쁨에 온 몸이 젖 었고 머리털이 설 것 같은 행복감에 떨고 말았다. 

  그날도 민수는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3차에 걸쳐 술을 마셨다. 민수는 그 밤도 취하여 달과 함께 사무실 옆 숙소에 들어왔다. 돌아오는 길에서 그는 가로수와 전봇대, 삼색 들고양이와 어느 집 철문 너머의 진돗개, 그리고 벽에 붙어있는 어 떤 여가수의 콘서트 포스터와 마주쳤고 그것들에게 각각 알아들 수 없는 말로 떠 들어 댔지만 그것들은 민수에게 관심이 없었다. 

 민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업어졌다. 그리고 뒤척이며 옆으로 누웠을 때 열린 창문 틈 사이로 하얀 직선의 달빛이 새어 들어왔고  그 끝에 어슴푸레하게 서 있는 그의 기타와 눈이 마주쳤다. 기타는 1번과 2번 줄이 끊어져 있었다. 민수는 그것이 새삼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피곤하여 그대로 눈을 감고서 잠들어 버렸다.
 

 어느 날 민수는 식당에서 늦은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당 벽에 걸린 TV에 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미국의 SAAD 한국 배치를 우리 정부가 승인하였고 중 국 본토에서는 그에 반발하여 한국에 대한 보복성 불매운동을 시작했다는 뉴스였 다. 

  민수는 평소 뉴스에 관심이 없었고 더구나 그가 싫어하는 정치적인 뉴스는 그의 귀까지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사건이 민수의 사업에 영향을, 그것도 악영향을 주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 까지만 해도 관광도시인 제주도는 관광의 호황이었고 관광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인들은 귀찮을 정도로 많았다. 관광호텔이나 면세점 주변의 거리는 수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점령하고 있어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마치 공연장의 인파를 뚫고 가는 것과 같았다. 관광객 인파와 어깨와 팔을 부딪혀야 했고 50m를 걸어가는데 10분이 걸리기도 했다.  그것이 SAAD사건 후에는 그 거리에 중국인이 사라졌고 한적한 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한적함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불신으로 굳어진 민수는 관광으로부터 시작된 불 경기를 별로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주변 업계의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불경기에 대한 말을 자주 들었고, 그러면서 차츰 현실에 대한 변화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정확히 알게 된 것은 세무신고를 위해 정산하면서 예상에 미치 지 못한 매출을 확인할 때, 그리고 지금까지는 없었던 하청업체로부터의 대금 독촉 전화를 받으면서 였다. 또한 어느 날은 늘 바쁘게 일하던 직원들이 갑자기 한가해졌고 직원들이 한가함에 대해 민수의 눈치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을 보았을 때 그는 그제야 무거운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회사의 매출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가자 언젠가부터 민수는 지금까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던 매출에 대한 손익계산을 하는 습관이 들었다. 그것은 경영자로서 당연히 확인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장인이 아닌 상인이 된 듯한 느낌으로 마음으로부터 내키지 않았었고 늘 매출이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 은 무능력자의 조악한 행위라고 생각했었다.  어느 날 그는 선배의 집에 놀러 갔다가 거기에 있는 삐걱거리는 테이블을 고쳐 주고 있었다. 선배의 집은 숲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조용하고 가끔 바람소리와 새들 소리만 들리는 한적한 곳이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산업도로가 있었지 만. 차들의 소음은 거의 들리지는 않았다. 가끔 여럿이 달리는 오토바이 소리가 날 뿐이었다. 

  민수가 그 집 베란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멀리서부터 자동차 여러 대의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오토바이는 아니었고 튜닝한 차들이 떼로 달 리는 소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짜내는 듯한 억지 배기음에 신 경 쓰여서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선배는 과일을 깎으면서 주말이면 늘 저 런 튜닝카 무리들이 지나간다고 하면서 그다지 관심 없는 표정으로 과일 깎기에 열중하였다. 

  멀리서 들리던 굉음은 5초 후, 이 집의 가장 가까운 곳을 통과하면서 쥐어짜서 찢어지는 배기음이 최고조에 달했다. 민수는 무심결에 그 차들의 속도를 예상해 보았다. 차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5초 후에 이곳을 통과했다면 앞으로 5초 후에는 소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배기구는 우리 쪽을 향 해 있으므로 5초를 추가해 주었다. 그런데 그 계산이 빗나갔다. 5초를 더 주었는 데도 불구하고 거의 20초 후까지 배기음이 사라지지 않았으며 소리가 완전히 사 라지기 까지는 무려 30초를 초과해야만 했다. 그곳은 직선 도로이므로 그들은 차를 죽도록 달렸을 텐데도 말이다. 민수는 머릿속으로 한참을 계산하다가 1분 만에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 튜닝카들이 소리만큼 실제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다는 것이며 다만 우렁찬 소리 때문에 빠를 것이라고 착각을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만약 이곳에 나무가 둘러싸지 않았다면 그 폭주족들은 아직도 자신의 시야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빨간 꽁무니들이 보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민수는 의자를 수리하다가 몇 가지 목공구를 가지러 자신의 차로 갔다. 그리고 트렁크에 있는 공구함에서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정작 필요한 공구를 공장에 놓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도로 쪽을 보았다. 좀 전의 달리던 차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왠지 그것이 자신의 최근 일하고도 닮았다는 생각을 하 였다. 그는 외부의 사람들이 자신과 자신의 회사를 그들의 눈으로 볼 때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민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최근 손익계산을 해 보면서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 을 알고 얼마나 실망했던가. 일하는 양과 노력에 비해 늘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까지 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서 좀 전에 본 그 튜닝카 무리들이 생각났다. 튜닝카들은 그래도 결국 자신의 시야를 벗어나 사라졌지만 자신은 그렇게 자금과 노력을 쥐어짜면서 일했는데도 아직도 그 자리 이거나 뒤떨어지다 니...

 그는 갑자기 어두운 주차장 한가운데서 우울해졌다.  민수는 이 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일에 대한 효율과 비효율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평소 질주하는 즐거움으로 스포츠카를 타다가 어느 날 처 음으로 연비 계산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달리면 달릴수록 연비가 나빠지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어두운 주차장에서 그의 생각은 더 어두운 생각으로 빠져들어갔다. 

  "이 일은 정말 나와 직원들을 위한 일인가..." 

 "이 것은 역시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중간 계층이 자신의 계층을 유지하기 위 해 그것이 소수 상위 계층을 위한 것이라는 것도 잊은 채 제 살을 깎으면서 까 지 하위 계층에게 노동을 착취하는 어이없는 일은 아닌가?" 

 "그리고 노동자는 착취를 당하면서도 그것은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것이라고, 그래서 그것은 행복한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능동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어둡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민수는 생각했다. 

  우울해진 민수는 손 보던 가구를 대충 마무리 해 놓고 선배에게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선배의 집을 나와서 자신도 튜닝카들이 질주했던 그 산업도로를 타 고 갔다.  민수는 운전을 하면서도 그 어두운 생각을 머리와 가슴속에서 정리하여 빼내지 못했다. 그러면서 붉은 신호등에 멈춘 앞 차와 충돌할 뻔했다. 민수는 그것을 피로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한적한 곳으로 빠져나와 차를 세우고 잠시 자려고 시트를 뒤로 젖힌 다음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이 그렇게 쉽게 올 리가 없었으므로 자는 척 만 하였다.
 

 그 날 이후 민수는 새로 들어온 일에 대해서도 항상 하는 일이었음에도  마치 처음 보는 낯설고 위험한 손님처럼 느껴졌고 어색함과 경계심을 놓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일을 멀리하지는 못했다. 이미 몸에 익어버린 일에 대한 집착과 성실함 때문에 일을 보고 뿌리치거나 거절하는 것은 더욱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점차 그것이 자신의 주체성의 부재와 우유부단함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날 한 달 가까이 걸려서 제작한 가구의 납품을 며칠 앞두고 선임 직원이었던 김 부장이 회사에 나오지 않았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 며칠 후 그와 친하게 지내던 말단 직원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그 직원은 김 부장이 사라진 이유는 여 자 문제 때문이라고 했다. 민수는 그런 여자 문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 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도 할 수도 없었다. 또한 그런 일이란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픽션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주변에서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보다 민수는 곧 납품을 앞두고 있는 이 중요한 상황에서 이런 의외의 사건 때 문에 납품이 지연되거나 최악의 경우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수는 언제나 자신에게 일은 일 순위였기 때문에 지금껏 거래처와의 약속을 어긴 적도 없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불안해졌고 걱정이 눈 앞을 가렸다. 


 결국 민수는 그날 밤 직접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작업복으로 갈아 입고 공장으로 들어갔다. 

  오랜 기간 직접 작업을 했던 공장이었지만 요 근래 영업에 치중하면서 잠시 제 작에서 손을 뗐기 때문에 공장의 공구들과 냄새가 다소 낯설었다. 

  민수는 바로 작업에 들어갔고 납품 일은 이미 늦었지만 서둘러서 최대한 빨리 납품하고 싶었다. 그가 전동공구들을 몇 번 만지자 그것들이 금세 익숙해졌다. 

  그는 가구의 문짝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탁상 회전 톱을 이용해서 원목판을 재단하기 시작했다. 재단의 정확성을 위해 반드시 하 번에 한 장씩 재단을 해야 하는데, 작업이 바로 손에 익어지자 그 날 따라 서두르며 두 장 혹은 세 장씩 올려놓고 밀어서 재단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은 원숙한 목수들이 아니면 재단 이 잘 못되거나 위험할 수도 있는 작업방식이었다. 

  민수는 그때 작업을 하면서 다른 생각을 한 것일까, 혹은 작업에 너무 몰두했던 것일까.  순간 "투두둑" 하며 강한 진동이 손가락에 감지되었고 그러면서 감전되는 것 같은 충격이 전해졌다. 그의 장갑이 회전하는 톱날에 끼어 들어간 것이다. 민수는 그때 바로 손을 빼내고 스위치를 껐다. 동물적인 감각의 빠른 속도였다. 크게 긴 장했기 때문에 5초 동안 손에서 통증을 느끼지 못했지만 곧 엄청난 통증이 시작되었고 장갑 끝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공장 안이 모두 하얗게 보였다. 

  민수는 119를 생각했지만 다행히 병원이 공장 근처에 있어서 직접 뛰어가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장갑을 끼운 채로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달리는 진동에 점점 손가락의 통증은 팔을 통해 뇌로 전달되었는데 그 느낌은 엄청난 공포와 고통이 강렬하게 질러대는 외침 같았다. 민수는 너무 두려워서 손 쪽을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달리면서 울었다.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이후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던 것이다. 그의 울음소리 속에는 두려움과 아픔과는 또 다른 강렬한 좌절감과 모멸감이 뒤섞여 있었다. 

 민수는 겨우 응급실에 도착하였고 간이 수술대에 올랐을 때 기절하였다.
 

 민수가 눈을 떴을 때 병원 냄새가 강하게 코를 자극했고 머리 위에서는 김 부장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른손은 하얀 붕대로 두껍게 감겨 있었고 거기서 주기적으로 약한 통증이 동반된 진동이 전해왔다. 밤새 강렬한 전투 가 벌어졌던 전장의 아침, 화염이 진화된 나무와 집들에서 나오는 하얀 연기가 들녘에 깔리고 그것이 아침 공기를 타고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곧이어 한 명의 의사와 간호사 두 명이 들어왔다. 민수의 상태를 점검하며 의사는 

  "손가락 봉합 수술은 잘 되었습니다. 이제 충분히 휴식을 취하십시오."

 라고 말하지 않았다.

  "손가락의 절단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완전한 봉합이 불가능했습니다."

 라며 링거액을 교체하던 간호사가 말했다. 그리고 어제 의식을 잃은 것은 그동안 영양상태가 매우 안 좋은 상태에서 강한 스트레스가 겹쳤기 때문이라고 또 다른 간호사가 말해주었다.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가락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을 반신 반의 했다. 

  며칠 후 민수는 붕대를 교체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확인했다. 검지와 중지의 끝 마디가 없었고 보기 흉측했으며 낯설었다.
 

 민수는 그 후 일주일 동안 손가락의 치료와 영양제를 맞으면서 쉴 수 있었다.

  김 부장은 매일 민수를 찾아왔다. 김 부장은 회사에서 사라지기 전보다 얼굴이 희 고 밝아진 것 같았고 표정에서는 어쩐지 어른스러움이 묻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민수는 병원에 있는 동안 김 부장과 오랜만에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김 부장은 의외로 인생 이야기를 많이 하였는데 '세상에는 의미 있고 소중한 것들이 많지만 그것이 일만은 아니다'라는 투의 말을 자주 하였다. 민수는 자신보다 어린 김 부장으로부터 그런 어른 같은 말을 듣는 것이 거북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 말들을 거부하지 못했고 동의하며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민수와 김 부장은 함께 회사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그를 걱정해 주었던 거래처의 사장과 담당 직원들을 찾아다니며 인사하였다. 모두들 민수의 건강을 위로하였고 더불어 격려해주었다. 또한 민수는 회사의 수주 량은 점점 줄어드는 데도 그런 오래된 거래처들이 여전히 이 회사의 신뢰감뿐 아니라 제품의 디자인과 좋은 품질에 만족하며 주기적으로 발주해 주는 것에 진심으로 고마움과 감사를 전하였다.


 대학에서 매년 졸업생을 배출하고, 국가나 민간의 각종 자격증 시험에서는 합격 자를 배출하는 것처럼 민수와 같은 업종에서도 동종의 회사에서 일을 배우던 30 대 후반의 직원들이 새로 자신의 회사를 차려 독립하는 일도 많아졌다. 그들은 제품에 대해 다소 세련되지 못하고 일에 대한 노하우도 적었지만 파격적인 새로 움과 일에 대한 불같은 열정은 민수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기존의 업자들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그것은 민수도 그들의 눈빛을 보고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가진 것도, 잃을 것도 없이 자신들의 싱싱한 몸과 더운 열정만 가지고 시작하는 젊은 이들은 어쩌면 그 누구보다 위협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노 숙자나 광인 또는 구석에 몰린 짐승처럼 더 이상 후퇴하거나 떨어질 공간이 없는 위치이며 하향 곡선의 마지막 전환 포인트 같은 것이다. 

  뒷골목의 래퍼가 기성 가수보다 신선하며, 배달맨이 고급 승용차보다 빠르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정해진 틀도 없지만 어떠한 틀에도 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벌써 어떤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기성세대의 최대 약점은 이미 가진 것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프로는 아마추어에 비해 독자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성공의 함정이다.
 

 민수는 지금 중견이고 기성이며 프로이다. 그는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가 초창기 아마추어 때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민수는 어제처럼 일한다. 아니, 어제만큼 일한다. 어제보다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는다. 그의 기준은 단 지 어제가 되었고 그것은 이제 그에게는 보편적인 삶의 기준이 되었다.

  민수도 이제 더 이상 잃지 않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것은 버티기 위한 몸부림이다. 
 

 민수가 그렇게 쉼 없이 일하면서 그의 잘린 손가락 마디의 연약했던 살갗도 점 점 무뎌지고 두꺼워져 갔다.


 그 후 그는 손가락으로 인한 불편함은 극복되었지만 50대가 되면서 지금까지는 없었던 여러 가지 중년의 질환들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고질적인 관절염과 허리와 어깨의 통증은 하루하루 다르게 심해져 갔다. 그래서 자주 일을 멈추고 쉬는 때가 많아졌고 특히 요통이 시작되면 며칠씩 쉬어야 했다. 그 리고 그것은 직원들 에게도 어떤 영향을 주고 있었다. 


 한편 회사는 일감이 점점 줄어들었고 직원들은 한가해졌다. 그들의 가구는 디자인이나 품질은 좋았지만 신생 회사들과의 가격 경쟁에서는 많이 밀렸다. 그의 회 사는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매년 정례적으로 발주받아온 오래된 거래처로부터 계약이 유찰되었다. 모두 신생 업체의 미친듯한 저가 공략에 밀린 것이다. 

  민수는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해서 작은 일로 거래처를 찾아가 서 사정을 하거나 큰 수주를 앞두고 영업상 접대 같은 것을 하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지만 이번에는 몸소 거래처 직원을 만나러 갔다. 

  거래처 담당자는 최근 자신들의 변화를 말해주었다. 최근 신생업체들이 저렴한 가격과 새로운 인맥으로 투지에 가깝게 들이대고 있고, 또한 자신들의 윗선 간부들도 거의 교체되면서 이제는 자신들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것을 요구하 고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도 지금까지와 같은 안정된 것을 유지하는 것이 윗선 에게는  마치 변화를 싫어하고 무능력하며 안정적인 업무자세가 개인적 안위로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제는 지금까지는 없었던 윗선의 눈치를 보고 있고 가끔 위기감도 느끼고 있다며 민수에게 고백하는 듯 혹은 변호하는 듯 말하였다. 

  민수는 그 얘기를 듣고 특별히 다른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굳어진 표정을 억눌러 생긴 어중간하고 허무한 미소의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그곳을 나왔다. 그리고 정문 앞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하였다. 된장찌개를 주문했다. 국과 물을 자주 번 갈아 마셨는데 국과 물의 맛을 분간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민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자신이 처음에 그랬듯이 김 부장에게 자신의 부채를 포함하여 운영을 넘겼다. 그리고 박사장처럼 아픈 몸만 겨우 빠져나왔다. 

  민수가 회사를 창업했을 때 박사장의 나이는 58세였고 자신은 40세였다. 지금 민수의 나이는 55세이고 김 부장은 그때의 자신과 같은 40세이다. 
 

 민수는 숙소에서 자신의 짐을 챙기다가 창고에서 먼지에 덮여 있는 자신의 기타를 보았다. 그와 함께 입사했던 기타이다. 

  민수는 생각했다. 그는 좋은 일이 있거나 희망이 생겼을 때는 늘 기타를 쳤었다. 그에게 기타는 슬프거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것이 아닌 기쁨과 희망을 노래하는 용도였다. 

  그가 기타를 꺼내어 먼지를 털려고 했을 때 사운드홀 안에 거미줄이 쳐 있었다. 

  기타의 먼지를 닦고 자세를 잡아보았다. 어쩐지 아직 온기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기타를 치고 싶어 졌다. 의자에 앉아 자세를 잡고, 부를 노래와 코드를 생각했고, 아르페지오의 맑은 음을 상상했고, 그리고 기타를 쳤다. 그런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현을 튕겨야 할 민수의 손가락 마디가 없었다. 깊게 손가락을 넣어 쳤지만 일그러진 잡음만 들렸다. 민수는 이마 쪽에서 더운 열기가 솟아올랐고 잠시 후 그 열기가 식어서 눈물로 흘러내렸다. 

  민수는 먼지 구덩이 창고의 아무 데나 주저앉았다. 그리고 곧 깊은 상념에 빠져 서 허리와 어깨에 온 통증을 느끼지 못하였다.
 

관절염과 요통은 평소 잘못된 자세에서 비롯된다는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확실 히 그는 지금까지 매일 희망과 도전이라는 편향된 자세로 살아왔었다. 그것들의 반대편은 무와 어둠뿐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한쪽 방향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것이다. 그가 혁신이라는 희망을 위해 매일매일 일만 하며 살아온 40대는 어쩌면 넘을 수 없는 현실과 자신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감추거나 그것들로부터 나약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반들반들해진 손가락을 보면서 다시 생각했다.
 

 잘린 손가락 마디는 굳게 다져질 수는 있어도 새로 자리지는 못한 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잘못된 자세의 최후가 요통과 관절염 이듯 편향적 사고의 최후는 고지식 과 불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민수는 몇 시간 만에 먼지 구덩이에서 일어나 보잘것없는 짐을 챙겨서 창고를 나갔다. 

 그리고 다리가 저렸기 때문에 절룩거리며 걸어 나갔다.
 

 오늘은 민수의 송별회 날이다.    

 직원들은 일을 일찍 마무리하고 회사 앞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그들 중 몇몇은 송별회가 끝난 후 야간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작업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식당의 가장 큰 테이블에 모두 둘러앉았다. 처음 몇 잔은 소주를 따라 건배하며 마셨다. 빈 속에 소주가 몇 잔 들어가자 그들의 얼굴은 금세 약간 핑크색으로 고조되었다. 그리고 이 어설픈 분위기를 빠르게 전환하려고 아직 손에 톱밥이 묻어 있는 어린 직원은 맥주에 소주를 혼합하였고 그 잔들을 각자의 앞에 놓았다.   

 김 부장은 그들이 아직 취하지 않았을 때 기회를 틈타서 소리 내어 말했다.  

 " 이제 오늘로서 회사를 떠나는 사장님의 마지막 한 마디를 듣겠습니다."  민수는 갑자기 마지막이라는 말이 가슴에 강하고 깊게 와 닿아서 순간적으로 낮부터 생각해 두었던 말들을 잊어버릴 뻔했다. 민수는 직원들을 향해 돌아 앉았다. 모두들 그의 눈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눈동자들은 맑고 진지했다. 민수는 지금 까지 그런 눈들을 처음 보았다.
 

 "너희들은 아직 젊잖아. 그것이 나는 제일 부럽다. 무엇이든 해 낼 수 있는 충분 한 시간과 에너지가 풍부하니까. 내일부터는 내가 없더라도, 아니 없으니까 누구 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각자의 의지를 기준으로 지금까지처럼 열심히 일해 주 기를 바란다. 너희들은 나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목표를 정해 두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 젊은 혈기를 불사르며 그 열기를 식게 하지 않게 하여 희망을 꺼뜨리지 말아라..."


라고 민수는 낮부터 생각해 두었던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스스로를 속이며 그것을 방임해 왔던 그 따위의 최면술 같은 말 들을 다시 하려니까 울컥 구역질이 나왔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민수는 다시 한번 직원들을 보았다. 아직도 초롱하게 빛 나는 눈동자들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와 너희들이 젊음을 희생하여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우리들은 결국 자본주의라는 커다란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평생 동안 그 자리에서 쳇바퀴만 돌다가 결국 닳아버리면 새 톱니바퀴로 교체되어 버려지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희망이라는 반복되는 뇌새김의 함정은 우리가 정말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를 망각하게 만들어 버리고 자신들의 소중한 기억과 자존심마저 증발시키는 것이다. 그리고는 녹슬어 부스러기만 남는 거야.   

 우리는 인생에서 황금같이 빛나는 젊음을 이용당하고 착취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봤을까?.   젊은 너희들은 언제든지 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기대하며 갈망하고 있겠지만 결 국 그 기대와 갈망이 너희를 역습한다는 것을 알게 될 거다.  부탁하지만, 제발 희망 같은 것 따위에 다시 오지 않을 젊음을 빼앗기지 말아라!. " 
 

라며 민수는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회식 후에 야간작업을 해야 할 어린 직원 들의 순진하고 맑은 눈동자들에 대고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결국 민수는 많이 취했다는 핑계로 머릿속에 준비했던 말들이나 마음에 담아 두 었던 말들 그 어느 것도 말하지 못하고 근거 없는 어설픈 말들만 주섬주섬 꿰매 어 나갔다. 그 후에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자리에 설 곳이 없어진 것 같은 불안함이 엄습하여 대충 핑계를 대고 먼저 삼겹살집을 빠져나왔다. 김 부장과 직원들이 문밖까지 따라 나왔다. 그들에게 마지막 같은 악수를 청했다. 그들의 손 보다 민수의 손이 가장 따뜻하였다.


 민수는 이제 정말 혼자가 되었다. 그는 애월의 마을과 방파제, 등대와 저 먼 바 다의 고깃배 불빛들이 가장 잘 보이는 언덕, 그 아늑한 평온의 장소로 천천히 걸 어 올라갔다. 그리고 올라가는 길의 편의점에서 캔맥주 몇 개를 사서 검은색 비닐봉지에 담았다.  그 평온의 장소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주변의 풍경은 늘 변함이 없었는데 시간만이 15년이 흘러있었다. 가장 많이 변한 건 오직 민수뿐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동안 하루방처럼 움직이지 않고 서있다가 이내 애월항과 마을의 둥그런 불빛들 에서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캔맥주로 눈의 초점을 이동하였 다. 맥주의 상표가 초점에 정확히 잡혔다. 그 상표는 온통 외국어로 쓰여있는 수입 맥주였으므로 민수는 그것을 읽을 수 없었다.


 문득 자신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를 생각했다. 가장 뚜렷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박 사장이었다. 갑자기 박사장이 그리워졌고 보고 싶어 졌다. 그리고 맥주 두 캔 을 다 마시기 전에 근처 바닷가 언덕에 살고 있는 박사장의 집을 향해 걸어 내려갔다. 


 민수는 이제 먼 곳이 아닌 바로 앞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선배에게 위로받고 싶어 졌다.  언덕을 내려올 때는 한 밤인데도 이제 작업을 시작하는 수많은 고깃배들의 불빛 이 민수의 앞 길을 환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 끝 -

작가의 이전글 [소설] 해변의 사투-6 (終)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