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 #4. Central Park
‘대체 이런 게임을 왜 하는거예요? 이해가 안되잖아요?’
‘이해할 필요 없어요. 그냥 믿으면 돼요.’
‘뭘 믿어야 하는데요?’
‘운명.’
학창시절 썼던 일기를 다시 들춰보면, 10년이 지난 일임에도 그때의 감정과 온도가 시간의 터널을 통과해 쏜살같이 내 주위를 다시 감싸는게 느껴진다. 만약 내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싶다면, 나는 내 십대의 어느 3월 마지막 날의 일기를 고를 것이다.
새학년으로 올라갔을 때, 선생님은 우리 학년을 가르치지 않으셨고 나는 그 사실을 알고난 후부터 몹쓸 상사병에 걸렸다. 상사병이라는 말은 고전문학 시조에서나 볼줄 알았는데, 그즈음 내가 걸린 ‘그리다 죽을 병’을 짧게 부를 말은 이 말밖에 없었다. 안그래도 좋아했던 선생님은, 내게 생전 처음으로 ‘사랑’이란 말을 진심으로 읊조리게 하는 존재가 됐다.
모의고사 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교내 대다수 선생님들이 매 과목마다 지정된 교실에 들어갔다. 난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어차피 우리 학년 담당도 아니니까, 우리가 시험 봐도 한 과목에도 안들어오실거야 – 교실은 시끄러웠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가 읽던 소설 ‘연금술사’의 마지막 몇 장을 다 읽기 위해 제자리로 돌아갔다. 소설은 어마어마하게 멋지게 끝났다. 주인공은 성공적인 여정 끝에, 사랑하는 여인에게 ‘돌아가겠소’ 약속한다. 마지막 장을 넘겼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가 한번더 그 구절을 읽었다. ‘이제 당신에게 돌아가겠소.’나도 나의 표지를 향해 가고싶었다. 사랑에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간 떠올랐다 천천히 사라졌다. 난 책을 덮었다.
그때 누군가 책상을 팡! 내리쳤다. 고개를 들었다.
교탁 앞에 선생님이 서 계셨다.
선생님.
그날 나의 일기는 모든 것에 대한 감사였다. 누구에게 고마워해야할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난 일기 속에 외쳤다. ‘수많은 나라중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수많은 동네중 이 동네에 살아서, 수많은 학교중 이 학교에, 이 해에 다닐 수 있어서!’
수많은 우연의 길 중에서, 내가 걷고 있는 지금과 여기를 나의 ‘운명’이라 한다.
그순간 내게는 선생님이, 선생님을 만난 나의 이야기가, 하나뿐인 ‘운명’이었고 최고의 선물이었다.
난 그게 영원할거라 믿었다.
센트럴파크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왜 굳이 자전거를 타고 다닐 마음이 들었는진 모르겠다. 내리막길에서 두 손 놓고 바람 쐬는 흡사 광고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싶어서였는지도. 어쨌거나 난 울창한 여름나무 사이로 자전거를 끌고 들어갔다. 지도를 뒷주머니에 쑤셔넣고, ‘길아 길아 나오너라 나는 그저 달리련다’ 마인드로 페달을 밟았다.
기어가 고장난 것은 시간이 꽤 지나 알게 됐다. 최대 3단인 기어와 연약한 다리근육 때문에 조금만 가파른 언덕길이 나와도 나는 헥헥대며 자전거를 끌고 걸어갔다. 그러나 완막한 경사를 지나 다시 내리막길이 나오면, 안장에 폴짝 올라타 오르막길의 고생은 100년전일처럼 잊어버리고 다시 뉴욕의 바람을 맞았다.
한바퀴 도는 동안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내리막길 이후 페달을 쭉쭉 밟아나가며 빠른 속도로 커브길을 돌자마자 눈에 떡하니 들어온 작은 호수였다. 닦아놓은 듯 맑은 호수에는 맨해튼의 오후 하늘이 담겨있었다. 호숫가엔 사람들이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누군가 라디오를 튼 듯 에스파냐풍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나가는 다른 자전거들과 조깅하는 사람들, 찌르르- 턱, 하고 돌아가는 체인과 페달소리를 따라 나는 다시 나무와 나무 사이로 들어갔고, 가지에 부서지는 햇빛과 우뚝 서있는 마천루의 꼭대기들을 지나쳤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연인들의 단골 데이트코스이자, 무언가 행복하고 평화로운 몽타주 장면의 배경이 되는 곳 바로 센트럴파크. 자전거를 타고서 내가 제일 가고싶었던 곳은 – 하필이면 여름이라 볼 수 없었던 울먼 스케이트링크였다. 나무 사이에 놓인 스케이트장 뒤로 건물들이 빛을 발하며 늘어선 사진은 십중팔구 울먼이다. 여길 가장 가고싶었던 이유는 영화 <세렌디피티> 때문이었다.
2001년 개봉한 <세렌디피티>, 그 제목의 뜻은 우연으로 인한 뜻밖의 위대한 발견이다. 제목의 정확한 뜻이 헷갈려 매번 검색해봐야하는 영화. 이 영화를 이번 뉴욕 여행 딱 1년 전에 봤다.
여자(사라)와 남자(조나단)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간다. 그곳에서 우연히 딱 1개 남은 장갑을 집게 되고, 이왕 만난거 시간같이 보내자 싶어서 둘이 즐거운 저녁을 보낸다. 남자는 여자와 보낸 시간이 즐거워 헤어지면서 여자에게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려달라하지만, 여자는 두 사람이 운명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만날거라며 알려주지 않는다. 분명 서로 호감을 가졌는데도 운명 타령하는 여자에 남자는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다. 여자는 중고책에 이름과 번호를 쓰고, 남자는 지폐에 똑같이 한다. 그리고 팔린 책과, 남의 손에 들어간 지폐. 운명이라면 서로의 손에 들어갈거란 말에 남자는 어이를 잃는다. 그런 남자의 요청에 여자가 좀더 확률 높은 마지막 운명의 게임을 제안하지만, 어이없는 실수로 두 사람은 영영 엇갈려버린다.
그런데 5년 후. 각자 결혼 예정이었던 둘은 갑자기 쏟아지는 운명의 힌트들 때문에 불현듯 서로를 다시 떠올린다. 결국 남자는 여자를 찾기로 결심하고, 여자도 남자를 만났던 뉴욕에 온다. 그러나 둘은 서로의 성도 모른다. 아는거라곤 사라, 조나단이라는 First Name뿐. 각종 단서들이 어찌어찌 그들을 연결하는 것 같지만 겨우
둘은 끝내 서로를 찾지 못한다.
결국 다 포기하고 예정대로 결혼하기로 한 남자. 그러나 남자가 결혼선물로 받은 중고책에 여자의 주소와 풀네임이 써있다. 잠시,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걸로 오해한 남자가 모든걸 포기..! 하는듯하지만, 이미 싱숭생숭한 마음 돌이킬 수 없는 남자는 결국 약혼을 파한다. 그렇다고 여자를 다시 찾아갈 생각은 없다 그녀는 짝이 있으니까. 원래대로라면 신혼여행을 가있을 그시간, 남자는 거리를 걷다 센트럴파크에 들어서고, 아이스링크 한복판에 드러누운채 추억을 회상할 뿐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눈에 익은 장갑 두 쪽이 눈송이들과 함께 날아오고... 뒤돌아보니 바로 그 여자, 사라가 자신을 보며 서 있다.
영화의 전반적인 스토리는 이렇듯 다소 황당하지만, 그 황당한 와중에 어쩐지 폐부를 찌르는 듯한 대사가 한줄기 조나단의 '친구' 입에서 나온다. 조나단이 사라를 찾기 위해 5년전 장갑 구매 영수증을 찾고, '사라'라는 여자와 살던 프랑스인을 찾아가는 등 다양하게 '뻘짓'을 하고 다닐 때, 친구는 오랫동안 사귄 여자친구와 가슴 아픈 이별을 했다. 조나단 스스로도 자신이 하는 행동이 한심하다고 자책할 때, 그런 친구가 말한다.
"너의 이 멍청한 짓들, 이거, 이 일들.. 전부 나와 너무 다르단말야... 솔직히 부러워. 넌 절대 포기하지마."
이 영화를 볼 때쯤에 나는 무턱대고 '일단 가고픈 곳'을 가기로 결심했었고, '일단 하고픈 일’에 과감히 도전해보기로 결정했었다. 그럼에도, 너무 오랫동안 시니컬해져있던 마음 때문에 안절부절 못한 때였는데. 그때 이 영화가 찾아와 – 뭐가 되든 끝까지 해보긴 하자는 메시지를 던져줬다. 그 해 크리스마스에 난 처음으로 러브액츄얼리 ost가 아닌 다른 영화의 ost를 들었다.
시작은 사라였지만, 조나단도 가면 갈수록 ‘운명’ 여부에 매달리기 시작하고 여자를 찾기 위해 갈 데까지 가본다. 이런 순수함이 한편으론 멍청함이, 학창시절 책장을 덮자마자 선생님이 등장한 것을 운명이라 믿었던 나의 첫사랑과 너무 닮았다.
물론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일기 속엔 헛소리 뿐이다.
유치해도 한번 따져본다면 - 우리나라에 태어난건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자란 동네 역시 아직도 좋아한다. 내 모교도 좋다. 다만, 그때처럼 감개무량할 정도도 아니고 그 감사의 이유가 선생님인건 더더욱 아니다.
모든 빛이 집중되어있던 그 자리는 비어진지 오래다.
누군가 불도저로 밀고 그 자리에 들어온건 아니었다.
그 자리가 비어진게 먼저였고, 비어서 먼지 끼기 직전인 그곳에 누군가 들어온 순이었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 지난 이의 온기가 있었나보다. 새로 들어온 이에 꽤나 적응하고 나니 다 치우지 못한 온기가 눈에 들어왔다. 화가 났다. 내 자신에 대해 화가 났고, 이루지 못한 짝사랑에 화가 났다. 선생님 탓도 했다. 무엇보다도 결국 ‘운명’이 아니었다는 사실, 뭐도 아닌데 운명 외쳤던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일기를 태워버리고 싶은 창피함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운명에 대해 굉장히 시니컬해졌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시 사랑이 찾아왔을 때 여파가 찾아왔다. 운명 아닐 수 있는데, 이렇게 ‘사랑한다’ 외쳐도 되는건가?갈등이 일어났다.
그 어떤 대상에 대한 감정도 사람에 대한 감정만큼 절절할 수 없으므로, 사랑에 대한 회의는 온갖 것에 대한 회의와 허무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이젠 순진하지 말고 더 똑똑하게, 속지 말고 더 현명하게 생각해야할 때라고 스물한살쯤의 내가 그랬다.
그땐 내게 두번 다시는 예전과 같은 사랑이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현실적이면서도 참 순진했고, 거만하기도 했다. 세상엔 내 마음을 흔들 이가 다신 없다는 어찌보면 다소 콧대높은 전제까지 깔려있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결국 두 번째로 누군갈 좋아하게 됐을 때, 나는 다시 멍청해지기로 했다. 그 사랑이 날 변하게 하는게 뻔히 보이는데, 끝날 걸 두려워하고 혹여 운명이 아닐까봐 쫄보처럼 도망치는건 아닌 것 같았다. 그 사랑은 나를 채워주니까. 끝없이 흔들리게 하지만, 또 끝없이 날 바로세우는 단 하나의 품이었으니까. 난 내가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으로도 양분을 먹고 자랄 수 있다는걸 알았다. 지금은 마음속에서 전부 쓸려나간 과거 첫사랑도, 나를 이만큼이나 자라게했던 자양분이 되었던 것 – 그것을 난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세렌디피티>가 나오기 정확히 1년전 나온 영화, 눈이 아닌 낙엽이 쌓인 센트럴파크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또다른 영화가 있다. 2000년에 개봉한 <뉴욕의 가을>이다.
남자(윌)는 마흔여덟. 여자(샬롯)는 스물에 불과하다. 남자는 관계에 책임진 적이 없다. 여자는 순수한 사랑을 믿는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 있고 싶다. 그러나 여자는 불치병 환자다. 남자는 처음엔 여자에게 다가가지만, 불안함을 감출 순 없다. 결국 남자는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한다. 어차피 여자와의 관계는 영원할 수 없으니까.
여자는 억울하다. 소중한 관계로 나아갈 듯 하더니, 함께 하룻밤도 보냈으면서 어떻게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우리의 사랑은요?’
‘제발 철좀 들어. 사랑따윈 없어!’
남자가 천하제일 나쁜놈이라는 비난이야 응당 들려올 것 같지만. 어쨌거나 남자 비판보단 ‘사랑따윈 없다’는 믿음이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나는 대략 유추해보고 싶다.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에서야 난 이렇게 생각한다.
‘아프니까’
아직 남자가 대형사고를 치기 전, 여자는 서로에 대해 더 알자며 작은 대화부터 시작하자고 한다. 유명한 레스토랑 주인으로서 요리를 끔찍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묻는다.
"음식이 도대체 왜 좋아요?"
남자가 답한다.
"음식은 아름다운 동시에 인간을 충족시켜주는 유일한 것이니까
(Food is the only beautiful thing that truly nourishes)."
완벽한 것은 없다 – 참 지겹도록 들은 얘기지만, 매번 직접 겪어보고 나서야 ‘아 맞아’하며 다시금 떠올리게 되는 말이다. 앞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화려하게 질주하는 것치고 뒤에 매캐한 연기 하나 남기지 않는 것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건 사랑. 나도 그렇게 믿는다. 그렇지만 사랑은, 그만큼 사람을 아프게해서 때로는 몸이 아픈 병만큼이나 사람을 고통스럽게, 말라죽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사랑만큼 인간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은 없지만, 또 그만큼 인간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을 수 있는 것도 없다.
지난 시간, 자기가 얼마나 무책임했는지 잘 알기에 –그 무책임이 사랑을 못믿게 만든 원인일 수도 있고, 사랑을 못믿게된 사건이 무책임을 낳은 것일수도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무턱대고 영원한 사랑 약속을 할 수가 없다. 초장부터 이 관계는 잘못된거라고 선을 긋는다. 생각해보라. 48세 남자와 20세 여자라니. 게다가 여자는 불치병에 걸렸다니! 샬롯은 비슷한 또래의, 더 책임감 강하고 성숙한 남자들과 만날 수도 있는 나이다.
그래서 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세렌디피티>에서 사라가 왜 그토록 그녀와 남자가 인연인가의 여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지, <뉴욕의 가을>에서 남자가 애써 사랑을 부정하려 하는지.
<뉴욕의 가을>에서 여자는 남자의 결핍을 채워준 존재였다. 남자는 여자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는 법을 배웠다. 자기가 외면했던 딸을 찾아갔고, 딸에게 용서를 구했다. 더는 도피하지 않았다.
영화 초반부 낙엽으로 가득찬 공원에서 여자는 남자의 손목에서 시계를 푼다. ‘내가 갖고 있을게요.’여자가 죽고 난 후 남자는 여자가 자신에게 이 시계를 작은 상자에 넣어 되돌려주려던 것을 깨닫는다. 여자 없이 남은 시계를 남자는 조심스레 어루만져본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동안, 여자는 남자의 시간을 잠시 가졌었다. 여자도 남자도 그 시간을 온전히 소유하진 않는다. 그 시간은 사랑의 것이다. 사랑의 시간은, 그 어떤 노력과 행운의 시간보다도 신비롭고 값지다. 인생 타임라인의 한 시간대를 사랑에 떼놓는다면, 그 시간동안 우리는 배우고 아파하고 비로소 성장한다. 스스로를 채운다.
그 시계를 보고서야 남자는 알았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음식만큼 아름다운 동시에 충족시켜주는건 없다. 하지만 사랑도, 그 대가가 어마어마한 아픔일 때도 있지만, 아름다우면서도 삶을 채워주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이기고 사랑을 선택한다.
사라는 책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고, 윌은 끝내 그 샬롯에게 그녀를 다시 사랑할 기회를 달라고 말하지 않는가. 불안하더라도, 실수 투성이더라도 결국엔 희망을 갖고 싶으니까. 사랑하고 싶으니까.
그 겨울, 나는 상처를 다시 받는 한이 있더라도 또 사랑을 할거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건 위대한 선택이 아니다. 솔직히 난 이 선택이 한심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알고 있다. 이뤄지기 힘들 수 있단걸. 그럼에도 난 사랑을 하기로 결정했다. 내 마음을 ‘사랑’이라 쓰기로 결심했다.
진짜 운명인지 아닌지 판단하느라 시간 낭비하고 자빠져있지 말고 일단 저지르고 보자 이거였다. 남다른 확신,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할래?' '말래?'의 갈등 자체가 애초에 단순한 흥미만으론 일어나지 못한다. 한두번의 부침은 의심이요, 의심이 존재하는 이상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 이유만으로 새로운 첫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고, 무성한 잎이 나부끼고 다시 낙엽이 떨어져 빈 가지 위 눈이 쌓이고, 그 눈이 녹으면 다시 싹이 자라고...
이 도시의 어떤 곳이 그렇지 않겠느냐만은. 센트럴파크는 계절의 흐름을 단순히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매년 더 깊은 싹과 꽃과 잎을 자아낸다. 이곳엔 한때 세렌디피티의 배경처럼 뉴욕의 겨울이 흐르고, 남자와 여자가 같이 걸었던 뉴욕의 가을이 흘렀다.
나는 비록 지금 뉴욕의 여름을 맛보고 있지만, 살짝 후덥지근한 오후의 공기에는 눈꽃과 낙엽 냄새가 서려있는 듯하다. 그래서 부족하지 않다. 눈앞에 놓인 이 뜨거운 여름을 사랑하는 순간, 내 자신이 채워지는 것이다.
‘사랑해?’
‘응. 사랑해.’
‘그 사랑이 우리가 말하는 그런 ’진짜 사랑‘일까?’
‘그럼. 만약 그렇지 않대도, 난 이렇게 말할래. 널 그렇게 ’사랑하고 싶어‘ 만약 신이 내린 절대적 정의가 있어서 사랑이란 말이 존재하는거라면, 그리고 내 사랑이 그것과는 다른 것이라 한다면, 널 그렇게 사랑하고 싶다고 말할거야.’
‘왜?’
‘사랑하니까.’
‘사랑해’란 말. 순도 백프로의,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이상적인 사랑, 아닐 수 있다. 완벽한 운명, 아닐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사랑하고 ‘싶으면’ 된다. 운명으로 여기고 싶으면 된다. 이미, 우리는 만났다.
마치 녹색 들판과 하늘만이 세상을 꽉 채우는 쉽 매도우(Sheep Meadow)의 풍경처럼, 모든 새로운 첫사랑은, 그에 대한 믿음은, 사람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삶을 굴러가게 한다.
인연은 센트럴파크에서 시작되고,
난 이곳에 맘편히 팔을 베고 누웠다.
이 저녁, 모든게 푸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