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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소원 한 닢

NY #3-2. The Lincoln Center

by 정동


작정하고 서사를 만들려 하지 않는 이상 기행문은 여행자처럼 이리저리 주제가 쏘다닌다. 생각과 감정의 파편들 투성이다. 시간도 장소도 만나는 사람도 전부 다 다르니 그럴수밖에. 어쩌다 얻어걸린 사건들의 관계성은 파편들 중 기억하고픈 조각만 '고르고' '자리를 정해주는' 과정에서 생기는 작은 행운이다.


연결하기 힘든 삶이 연결되는 것만큼 신기한 일이 또 있을까. 그 두 가지 일 사이에 긴 시간과, 먼 공간이 놓여져있다면 더더욱이나 말이다.


나에게는 그 많은 여행들을 한 실로 꿰주는 물건이 있다. 바로 '동전'이다.






난 여행을 갈때마다 꼭 동전을 줍는다.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녀서가 아니라, 길가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면꼭 동전이 있어서다.


2005년에 갔던 어느 도시의 지하철 계단에서 처음 시작된 이 동전의 행운은,

한동안 뜸했다가 스무살 이후부터 무섭도록 나를 찾아왔다. 여행지가 미주든, 유럽이든, 아시아든 상관없었다. 거리는 물론이요 비행기 안에서까지 주웠으니 이쯤되면 할 일 없는 동전 하나가 내 뒤를 졸졸 따라온다는 느낌까지 든다.

부작용은, 그런 행운이 계속 뒤따르다보니 이젠 동전을 줍지 않으면 어쩐지 여행을 끝내지 못한 것처럼 뒤가 찜찜하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내 발로 동전을 찾은 적도 꽤 되는데, 문제는 이 동전이란게 참 웃겨서 이쪽에서 눈을 부릅뜨고 찾아다니면 오히려 쥐구멍 속으로 쏙쏙 사라지는 것처럼 하나도 뵈질 않는다는 것이다.


3박 4일간의 상해 여행 땐 이틀 정도 동전이 보이지 않자, 여유시간을 활용하여 밤거리를 뒤진 적이 있었다. 친구와 정한 일정이 다 끝나서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놓고 가고 싶을 정도로 친구에겐 황당한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잡듯이 찾아봐도 나오지 않자 나는 제 풀에 쓰러졌다. 결국 상해는 동전 운이 없는가보다 싶었다. 긴 여로에 더해 동전까지 찾다가 지친 나, 그리고 그런 동행 때문에 더 지친 친구는 함께 편의점에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친구는 간단히 물과 휴지를 샀고, 나는 다리가 쑤셔 잠시 편의점 의자에 앉아있기로 했다.


그때. 의자에 앉은 후 푸욱- 한숨을 쉬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순간, 1위안 동전을 발견했다.


한편, 프랑스에선 일주일이 넘도록 동전을 발견하지 못해 8일차 되던 마르세유에서 또다시 동전 찾아 삼만리를 거행했다. 그 쨍볕 더위에 꼬박 30분을 돌아다니다니. 더군다나 동전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찾기요, 성경에서 글자 찾기여서 머리가 뱅뱅 돌 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동전을 찾긴 찾았다. 다만 상해에서처럼 에라 모르겠다 포기하고 나서야, 동전을 2개나 한꺼번에 줍게 된게 문제였다. 이쯤되니 슬슬 동전이 얄미워지기 시작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라는데, 행운이 계속되면 필연인줄 아는게 내 본성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고생만큼이나 말도 안되는 행운도 있었다. 짧았던 도쿄 여행 당시. 동전생각이걸랑 아예 하질 않다가 떠나는 날 공항 게이트 바로 앞에서 1엔을 주운걸 생각해보면, '비워야 얻는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이렇듯 구구절절 사연이 담긴 그놈의 동전.


이번 뉴욕 여행에서도 동전을 무수히 많이 봤다. 그런데 한가지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이 있었다.

어찌된게 보는 동전마다 길에 깊이 박혀있었다. 거의 눌러붙은 껌처럼 말이다.

누구 잘못일까.

우선은 사람들이 많이 떨구고, 아무도 줍지 않고, 그런데 차는 무진장 많이 굴러다니고. 그래서 결국 보도에 박혀 맨손으론 감히 파내지 못하게 된 것이겠지.


블록 하나 건널 때마다 그런 일이 생겨버리니, 아예 희망의 싹을 잘라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조그만 상자에 (주운) 동전 콜렉션을 만드는걸 여행의 소소한 낙으로 삼았던 내가

뉴욕에서는 동전을 봐도 결코 괘념치 않겠다는 나름의 가이드라인을 세운 것이다.


그렇게 몇날며칠을 보내다, 처음으로 거무튀튀한 아스팔트에 질식당하지 않은 날것의 동전을 보게 되었다. 링컨센터에서, 하필이면 링컨 대통령이 그려진 황색 5센트 짜리였다. 그걸 보고 나는 잠시동안 갈등했다. 이걸 주워, 말아? 처음으로 안박혀있으니 이거 하나쯤은 가질까 싶다가도, 뭐 지금껏 온갖 곳에서 많이 주웠으니까 뉴욕은 한번 지나쳐봐도 좋겠지,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채 10분도 안 지나, 나는 다시 그 동전 앞으로 달려왔다.






<어거스트 러쉬>의 에반이 아주 '잠시' 다닌 줄리어드 스쿨을 바라보며 감격하던 찰나, 그 앞에 설치된 조형물 하나를 보게 된 것이었다. 동서양 어디를 막론하고 이런 물가가 있으면 으레 동그랗고 반짝이는 게 담겨있게 마련이다. 그걸 보니 나도 어쩐지, 똑같이 동전을 던지고 싶었다. 좋아하는 영화 촬영지에서, 그것도 '음악'영화 촬영지에서 나도 무언가 빌어보고 싶었다. 그러면 음악의 힘을 빌어서라도 이 소원이 이뤄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주머니엔 지폐 뿐이었다. 지폐를 돌돌 말아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 나는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 방금 전 보았던 황색 구리조각을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진작 그렇게 할 것이지."


손에 든 동전이 내게 말하는 듯 했다. 좋아, 나보고 던지라고 이 넓디넓은 링컨센터 광장 한복판에 네가 있었구나. 혹시라도 광장 어딘가에 또다른 동전이 있을까 그제야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광장은 깨끗했다. 먼지 한 톨 없었다.


결국 5센트를 들고 와 분수대 앞에 다시 섰을 땐,

마지막 난관을 통과해야만 했다.


'동전 줍기 정말 힘든데, 곧 떠날 날이 다가오는데 그동안 못주우면

난 뉴욕에서 정말 하나도 못 줍는거야!'


당연한거 아니냐며 방방곡곡 눈이 빠져라 상해와 마르세유를 뒤졌던 일들을 생각하면, 이걸 지금 소원 비는 데 쓰는건 아까운 일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동전을 갖는 것보다, 지금 가진 소원이 더 간절했으니까.

다른 여행지와의 공통점이 있든 없든, 뉴욕은 뉴욕이고 이 도시에선 이 도시에서의 선택이 있는거 아닌가!

동전이 꿰어진 줄을 이제부터 끊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이 소원은 빌어야만 했다.


눈 딱 감고. 이번엔 '두고 오자.'


그렇게 난 손가락으로 동전을 튕겼고, 동전이 퐁당 하고 물에 빠지기 전 재빨리 소원을 빌었다.



'평생 OOO 가까이에 있게 해주세요.'


하고많은 소원 중 왜 이걸 빌었나 잠깐 생각이 들었지만, 링컨센터나 그 옆 줄리어드 스쿨에 참 어울리는 소원이었으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맘에 드는 것은,

언젠가 이 소원이 간절해지지 않는 그 순간에도, 수집함에서 하나 모자라는 동전을 보고서 그 소원을 떠올려 볼 수 있다는 것. 그게 좋다.



어쨌거나 나는 바라던 소원을 빌었고,

뉴욕에서 주운 동전은, 그대로 뉴욕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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