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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2 : 가장 되고 싶었던 것

NY #6. 5th Avenue

by 정동

있는건 아는데, 참 보기 힘든 것중 하나가 '별'이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이 있긴 분명 있다는데, 정작 내가 사는 서울에선 보질 못하니 어쩐지 착잡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일년에 거의 한번꼴로 시골에 내려갈 기회를 얻으면, 그제야 손꼽기는 약간 힘들 정도의 별을 보게 된다. 그마저도 보는게 어디야하며 내심 감사한 마음도 든다.


그런 내가 은하수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영화 속에 들어간 것마냥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만져볼 수라도 있으면 믿어볼텐데, 하늘은 저 끝에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만 들었다.

처음 본 은하수는 마시고 싶은만큼 맑았다. 할 수만 있다면 손을 넣어 저어보고 싶은 그 밤하늘, 나는 몇 곡의 노래를 들었고, 그중의 하나는 흐르는 은하수에 부드럽게 띄운 달과 같았다.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달빛이 흐르는 강, 저쪽까지 뻗어있는

I'm crossing you in style someday
언젠가 나는 당신을 아주 멋지게 건널거예요

Oh, dream maker, you heart breaker
오, 나를 꿈꾸게 하는 당신, 날 애타게 하는 사람

Wherever you're goin', I'm goin' your way
당신이 어디를 가든 난 당신을 따를거예요


-'Moon River' , Andrew Williams



화요일이었다. 콜럼버스 서클에서부터 시작해 센트럴파크를 살짝 가로질러 동쪽에 닿았다. 피프스 애비뉴(5th Avenue)를 따라내려왔으니, 구역명으로 따지자면 미드타운 맨해튼의 동쪽 부근을 살펴본 셈이다. 거리(Street) 하나 하나를 곁눈질하고 때로는 직접 걸어도보면서 5번가를 내려오는 동안, 수많은 영화를 떠올리느라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시작에는 5번가의 '티파니'가 있었다.





4. 티파니(Tiffany & Co.)



로마에서는 휴일을, 티파니에서는 아침을.


정확히 말하자면 티파니가 아니라 뉴욕에서의 아침이라고 하는게 맞겠지만, 어쨌거나 이 '티파니'의 본점은 바로 맨해튼 5번가에 위치해있다. 센트럴파크 남단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티파니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걸어가다보니 떡하니 'TIFFANY'하고 써있는 영화 속 그 가게가 눈에 보였다. 그리곤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문 리버가 재생되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주인공이자 가난한 소설가인 폴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꿈꾸는 홀리에게 말한다. 자기 눈 앞에서의 현실을 바라보지 않으려 하고, 결국 폴을 좋아한다는 마음보다 남미의 갑부 남자와 결혼해 싸구려 아파트를 훌쩍 떠나는 데만 관심을 갖는 홀리에게 폴은 말한다.


"당신은 비겁하고 용기도 없어요. 당당히 고개를 들고 '인생은 현실'이란걸 인정하려 들지 않아요.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속하는거예요. 그게 유일한 행복의 기회이니까요. 당신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가 우리에 가둘 것에 두려워하고 있다구요. 그래서 오히려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는거예요."


나는 사랑이 자유를 앗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대응하는 법, 그것을 이겨내는 법을 '사랑'의 관점에선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센트럴파크).


그러나 그밖의 일에선 여전히 어리숙하다. 자꾸만 도망치고, 자꾸만 상처에서 회피하는 것. 내 모자람을 직시하지 않고, 건강한 방식으로 채우기보다 계속해서 남탓을 한 것. 그러다보니 당연히 실력은 늘지 않고, 상처를 이길 힘은 더욱더 사라져만 가고, 그럴수록 나는 더 조급해졌던 것이다.



새내기 첫 개강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을 때, 동아리(영화도 아닌 봉사동아리)에 처음 들어가자 ‘수상실적이 어떻게 되냐’고 묻던 회장 말에 ‘대회 나가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게 사실인걸 어떡하나. 혼자 책상머리에서 구상하고 간혹 비디오를 찍은것밖에 난 자랑할만한게 하나도 없었다. 그때 소위 경력이 '짱짱했던' 회장은 별다른 대답을 않았지만 대놓고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뒤처졌다고 생각하게 됐다. 뒤처졌으니 해야 할일은 상에 비견되는 무언가를 이뤄내서 보란듯이 따라잡는 것뿐. 하지만 그 조급함이 오히려 나를 가뒀다. 배울 때도, 즐겨야 할 때도 나는 즐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설상가상, 완벽주의와 이상하게 맞물려 나를 더 게으르게 만들어버렸다. 잘될 땐 아무리 체력적으로 무리를 해도 힘이 펄펄 났지만, 조금만 틀어지면 전부 그만두고 싶었었다.


지금에야 많이 고쳤지만 그땐 그랬다. '난 상처만 받았으니까 이런만큼 더 풀어내도 돼. 난 억울한 사람이야!' 하지만 어디서 보상을 받으려 한걸까. 10대의 상처는 대학입시를 통해서, 20대의 상처는 빛나는 상패를 통해서 보상받으려 한게 아닐까. 그나마도 후자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문제가 남았으니, 난 도대체 무얼 좇았던 걸까.


상처를 성취로 보상받으려는게 완전히 나쁜 일이라 생각진 않는다. 하지만 동의할 수 없는 말이 있다. 열등감이 성공을 불러온다는 말 - 그건 말장난이다. 성공을 불러오는 ‘열등감’이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자기계발을 하려는’ 올바른 현실 인식이다. 내가 '열등'한 것에 초점을 맞추는게 아니라, 내가 더 '성장'하고 싶은 곳을 바라보는 일이다. 엄밀히 말해 열등감이 아닌 것이다. 진짜 열등감은 그냥 ‘난 못났고 정말 못났고 계속 못날거야’라는 끝없는 절망이다. 그건 성공은 물론이요 실패조차도 못 불러오는 독에 불과하다.

그래서 열등감을 직시 못하는걸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다. 열등감은 정말 엄청나게 아프다. 겉으로 드러난 질투와 도피성 선택 이면에 숨겨진 폐부를 들춰내는건, 피부에 난 상처를 뒤집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럽다.


물론 폴의 말도 맞다. 어떤 일들은 피할 수록 더 쫓아오기만 한다. 더욱이 내가 피하려고 하는 것이 진짜 '나'의 모습이라면, 그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가 없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진짜 '나'라는 것은 피하기만큼이나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도 힘들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피하려는 과정에서 결국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쪽길로 피해보고, 저쪽길로 피해보았지만 전부 실패하여 결국 돌아온 그 지점. 그곳에 나의 진짜 모습이 있다는걸 확인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진짜 '나'가 되는건 뭘까.


이 질문을 한번 던지고 나는 남쪽으로 내려갔다.




5. 매디슨 애비뉴(Madison Avenue)



매디슨 애비뉴. 이른바 ‘매드맨’으로 불리는 광고쟁이들이 가득한 곳이다. 어느 광고동아리 모집포스터를 보니 타임스퀘어 사진에서 광고화면만 채색해놓고 나머진 다 흑백으로 해놓았었다. 사실 타임스퀘어에 가면 정말 광고판말고는 보이는게 없긴 하다. ESB 전망대에서 봤을 때 유독 하얗게 뜨거워보이던 타임스퀘어의 불빛들, 광고만큼 환상적이고 예쁘지 않다면 모두 나방처럼 불태울 것만 같은 그 어지러운 빛이 사실은 매디슨 애비뉴라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걸 생각해보면 매디슨 애비뉴 역시 한번쯤은 동아리 포스터 주인공이 될만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찾은 곳은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오프닝에 나온 건물이다.


이 건물의 주소는 매디슨 650번지. 예상외로 건물이 너무 커 휴대폰 카메라의 작은 화각에 다 담을 수가 없었다. 대충 찍은 사진이 아쉽지만 어쨌든 히치콕 영화 한편에 잠시 들어갔다 나온 셈이니 만족스러웠다.


만약 어릴적 내가 타임스퀘어의 토이즈알어스(토이저러스)를 다녀갔다면, 그 기분은 지금 내가 매디슨 650번지 앞에 선 기분과 똑같았을 것이다.


히치콕 영화중 가장 먼저 본 영화는 <사이코>였다. 이마저도 스무살이 넘어서야 보았으니 다른 유명 감독들에 비해 한참이나 늦게 첫작을 접한 셈이었다. 영화가 너무 재밌어서 그 이후에 히치콕 작품을 더 챙겨보게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마음 속에서 가장 '꿀잼'으로 기억하는 두 작품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이창>이다. 스포츠 게임도 아니고, 그냥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려야하는 게임도 아닌 '영화'를 보면서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지는 경험은 이 두 작품을 통해 했던 것 같다.

참, 비록 세트 촬영이긴 했으나 <이창>의 배경 설정도 뉴욕이었다.


5. 그랜드센트럴 역 (The Grand Central Station)



원래 정류장, 터미널, 공항처럼 이곳저곳으로 갈 수 있는 공간을 좋아하는데,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은 ‘세계 최대’ 기차역이라는 점에서 묘하게 더 흥분되는 공간이었다. 44개 플랫폼과 67개 노선이 있다니 말 다했다. 한번쯤은 이곳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보고 싶다.


<마다가스카> 1편에서 얼룩말 마티가 처음 역에 도착후 전경을 바라보며 “It’s grand, and it’s central.”이라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 대사대로, 역에 도착하면 정말 그 이름이 딱 들어맞는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Hal Morey의 'Sunbeams Into Grand Central Station' 라는 사진으로 유명한 곳인데,



사진에 나온것처럼 채광창을 통해 햇빛이 또 하나의 건축골격처럼 바닥에 내리쬐는 모양이 장관이었다. 물론 저렇게 강렬한 선 빔을 눈으로 고스란히 볼 수는 없지만, 바닥에 네모난 모양으로 비치는 태양빛을 보는건 (이 사진 때문인지 몰라도) 기시감을 주는 동시에 또 환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사진을 비롯해 그랜드센트럴 역이 온갖 작품에 등장하다보니, 스탠리 큐브릭의 초기작 <킬러스키스> 오프닝에 등장하는 역도 여기인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역에서 뜻밖에도 좋은 구경을 했는데, 브룩스브라더스라는 양장 브랜드에서 여는 기념전이었다. 브랜드 역사를 제품과 함께 간단히 소개해놨는데, 그중 영화 <위대한 개츠비> 의상도 전시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니,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도 뉴욕 아니던가. 정확히는 맨해튼이 아닌, 롱아일랜드 서쪽 끝이지만.

뉴욕만큼이나 이 작품의 무대로 어울리는 곳은 또 없으리라 생각한다. 개츠비하면 떠오르는 것은 초록등대불빛인데, 사실 뉴욕에는 진짜 초록등대가 있다. 정확히는 초록동상이다. ESB에서 야경을 볼 때, 저만치 녹색 점 하나가 있기에 뭔가 싶었는데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개츠비가 바라보는 초록불빛,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뉴욕의 랜드마크. 참으로 닮아있다.




6. 뉴욕공립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



내게 뉴욕 도서관은,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비롯한 하고많은 영화들을 전부 제치고 오직 하나, <투모로우>의 배경으로 각인되어 있다.

어릴 때 재난영화를 정말 좋아했는데, 그중 <투모로우>를 제일 재밌게 봤다. 웅장한 OST 때문인가, 혹은 내내 도서관이라는 뭔가 독특하면서도 ‘있어보이는’ 공간에서 찍어서 그런가.

예전에 친구에게 물었었다. ‘난 왜 재난영화가 좋을까?’ 도시가 물바다가 되는 끔찍한 광경을 보면서 가슴깊이 안타까워하며 경악하면서도 은근히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단 말이야. 친구는 그냥 스펙터클에 열광하는게 아니냐고 말했다. 일리 있는 것 같다. 다만 나는 판타지가 아닌 현실적인 스펙터클을 선호하는 듯하지만 말이다.


작중 밀려오는 쓰나미를 피해 도서관으로 달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가 트래킹하며 보여주는 숏은 아직까지도 제일 좋아한다. 쓰나미에 커다란 유리창이 박살나고 고급진 대리석과 목재 벽이 낮은 온도에 바짝 얼어붙는 광경도 빼놓을 수 없다. 도시의 도서관 그리고 시스템을 구경하는 자리에서 혼자 영화 스튜디오에서나 볼법한 재난 시뮬레이션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품의 스펙터클 외에도 뉴욕도서관은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었다. 외관도 외관이지만, 우아한 내관도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을만큼 아름답고 웅장하다. 여행을 하며 도서관 몇 군데를 들러보았고 책도 몇권 집어봤지만, 마치 루브르 박물관을 구경하듯 계속해서 건물 내부를 바라보게 하는 도서관은 처음이었다.



사실 <투모로우>에는 한가지 불만 요소가 있었다. 피난민들이 나중에 구조될 때, 영화 초반부터 구텐베르크 활자 성경을 꼭 안고 있던 안경쓴 남자가 헬기를 탈 때까지도 그 책을 꼭 안으며 하는 대사이다. ‘인류 최초의 활자본 성경.’ 이 대사를 듣고 '최초의 활자본은 우리나라에 있는데'란 생각이 들어 불만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어릴땐 그런 멋져보이는 고집 하나쯤 가져보는게 인지상정. 영화 전반에 미국 우월주의가 슬쩍슬쩍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니 훗날 다시 작품을 봤을 땐 다시금 불편하기도 했지만- 어릴 때 보던 스펙타클은 아직도 짜릿하고 선명하니 그것만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두자.


<투모로우>를 통해 이상한 로망이 생기기도 했다. 영화 속 도서관에서 책으로 불을 때우며 이것저것 생활을 꾸려나가는 모습이 나에겐 캠핑만큼이나 재미있어 보였다. 그러자 드는 생각은 : 언젠간 나도 저런 '도서관 캠핑'을 해보고 싶다!



그 로망을 실현할 기회가 한번 있긴 했다. 새내기 시절, 대학 도서관에서 도서관 밤샘 책읽기 프로그램을 운영한 적이 있는데, 선착순 탈락으로 그만 참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참가자격도 1학년 제한이라, 2학년 때부턴 신청조차 못하니,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이밖에도 크라이슬러 빌딩, 뉴욕 타임즈, 록펠러 센터와 같은 여러 랜드마크와 극중 XX건물로 설정되었던 빌딩들, 그리고 작은 골목 모든 것이 다 영화였다. 머릿속엔 여행전 미리 챙겨놓은 테이프와 나도 본 기억이 없는 테이프들이 한가득이었는데, 거리를 걷다보니 저절로 누군가 재생하듯 틈만 나면 떠올랐다. 비록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영화 속과는 완전히 같은 모습일순 없다해도, 그 장소를 가보는 것만으로 발걸음이 가볍다못해 날뛰었던 것 같다.

학창시절 어느 수업시간에 ‘걸어서 세계속으로’ 뉴욕편을 봤는데, PD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촬영 현장을 발견하곤 특유의 나레이션 어조로 ‘맙소사.’하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영화찍는 광경을 보진 못했지만, 아무렴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큐브릭의 <샤이닝>에 나오는 호텔을 인물들이 걷던 것처럼, 나는 영화의 실제 배경을 진짜 누비고 다닌 것이다. ‘맙소사’ 소리는 도저히 끊일 수 없었다.


5번가가 아니라, 맨해튼을 배경으로 한 영화와 관련해 슬픈 소식을 이전에 읽은 적이 있었다. 영화 배경인 골목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토막 기사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버린줄 알았는데, 오래된 신문냄새가 물씬 풍기는 스크랩북 사이에서 툭 하고 떨어지는게 아니던가. 이들 골목 뿐이랴, 사실 대형 랜드마크도 영화속 모습과는 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를테면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배경 타임앤라이프(Time & Life) 빌딩을 찾아갔을 때도, 건물 인근이 전부 공사 중이어서 한참을 아쉬움에 바라보았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과 똑같은 모습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5번가를 그저 주욱 따라내려오며 영화 속 도시를 걷는다는 사실만으로 푹푹 찌는 더위를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 나 자신도 기억 속에 한 컷에 5번가를 새겨넣었으니 이걸로도 뿌듯하다. 기쁘다. 행복하다.






세상엔 무수히 많은 영화가 있고 많은 영화광이 있다. 단순히 수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영화는 어때야 한다든가 - 자신은 어떤 영화광이 되고싶어한다든가에 대한 생각의 종류는 굉장히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와 내가 생각하는 영화의 세계에서만큼, 뉴욕이란 도시는 한마디로 이렇다.


“It's GRAND, and it's CENTRAL.”



그런데 이쯤되니, 내 영화병이 나을거란 생각은 그만두는게 좋을 듯 싶다.

굳이 구체적인 영화제목과 장면을 떠올리지 못해도, ‘영화에서 본 것 같은’느낌을 나는 여행 내내 찾아냈고 또 찾아다녔다. 뉴욕이야, 굳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이곳저곳에서 보이니 내겐 거저 주어진 놀이터나 다름 없었다. 어떤 여행을 가든 그속에서 영화를 찾는건 마치 깜짝 선물과도 같았는데, 뉴욕 여행은 영화와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여행이었다. 도시 크기의 '스튜디오'니 오죽할까. 물론 LA의 스튜디오 안에도 뉴욕 거리를 모방한 세트가 있지만!


사실 지금껏 어중이떠중이처럼, 여기선 이런 영화를 찍었지 이런 음악이 흘렀지 이러저러한 생각만 하고 바깥으로 내뱉지 못했던게 사실이다.

아, 난 말해야만 했다.


"Do you like New York?"


초콜릿 가게 사장님과의 이 대화에 나는 대충 얼버무렸던 것이다. 주문할때만큼이나 자신만만하게 외칠걸 - 가게를 나오자마자, 난 이말을 외치지 않은걸 퍽 후회했다.


"Yeah it's such a great city!"


그러나 이 말을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이유는, 내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운 영화 때문이라는걸 나는 5번가에서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누군가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라 해도 못할 것 같았다. 온 도시가 온통 영화뿐인데. 내가 지금 거리를 걷는 이 이유가 바로 영화인데 어찌 가만히 있을까. 게다가 우연찮게도,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잊고 있던 내 '유년'을 가득 채우고 있기도 한데 말이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지막에 폴은 홀리에게 말했듯, 나 역시도 그런 성숙의 힘을 믿었다. 덜 아프기 위해선 더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강해져야만 하기 이전, 난 강해질 필요가 없었던 존재이기도 했다.


왜냐, 이미 강했었기 때문에.



내 안에서 무언가 줄줄 빠져나가 허약해지기 전, 나는 충분히 가득 찬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굳이 내 안을 방어할 필요가 없었다.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을 건너오기 전에, 나는 딱히 강해지라고 나에게 되새길 필요조차 없었다. 내 안에 영화가 가득찼을 때, 그것에 미쳐있을 때 난 제일 강했었다.


비록 내 삶을 ‘화려’하게 만들지는 못할지라도, 그래도 내 가슴 안에서 결코 떠나가지 않을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참 고마운 일이라고. 모든 사람들 안에는 이미 그런 것이 있지만,‘그래봤자 뭐해?’라는 생각 때문에, 누군가 나보단 이걸 더 사랑하고 있으리란 생각 때문에 으레 자신의 열정을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그럴 필요 정말 없는데. 그저 주어진 놀이터에서, 하루종일 함께해도 지치지 않는 그 무언가와 더불어 재미나게 놀다가면 그만인데.


뜨거운 야경 속에서 가장 별보기 힘든 도시일거라 생각되는 맨해튼에서, 그렇게 우연찮게 나는 숨어있던 별과 은하수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곳에 둥둥 떠있는 뉴욕의 달에 걸터 앉아, 천방지축이었던 내가 낚시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드림웍스의 로고처럼.


그래서 감사하다. 이곳에서 제일 되고 싶은 존재가 되었기에.


영화라는 별 아래서만 가능했고, 영화를 계속 사랑하기 위해 내가 되어야했던 진짜 '나'.



아, 뉴욕에서 난 아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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