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걷기 대회 출전
얼마나 왔을까, 저 멀리서 ‘1km’라고 크게 쓰인 표지판이 보였다. 이렇게 많이 왔는데 아직 1km라고? 이거 동네에서 연습할 때 느낀 그 감정이 아닌가. 이미 주위에는 한 두 명씩 걷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정신승리를 하며 의지박약인 나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 주위 99%의 분들이 아직 열심히 뛰는 것을 보며 정신을 차리고 몇 백 미터 뛰어봤지만 이미 한 번 걷기 시작한 나는 걷기의 달콤한 맛을 알아버렸다. 런데이 코치가 걷는 속도가 뛰는 속도보다 더 느리더라도 뛰는 자세를 유지하라고 했지만.............. 원래 운동이 머리로는 다 알지만 몸이 안 따라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다 보니 뒤에서 엄청난 속도로 앞질러 가는 분들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40분 페이스 메이커였다. 11km를 40분대에 뛰는 것은 사람인가? 1km를 4분 대에 뛰는 것이니 내 속도의 거의 2배이다. 그분들에게 놀란 것도 잠시, 자극을 받기는커녕 나와는 너무 다른 세계의 분들이기에 나는 거의 홀로 걷기 대회에 출전한 수준으로 걸었다. 변명을 해보자면 뛰는데 방해가 된 복병이 의지와 체력 말고도 하나 더 있었으니 그건 바로 바지였다. 바지가 계속 내려갔다! 집에서 입고 나올 때부터 좀 불안 불안했고 뛰기 시작하니 계속 내려가서 계속 뛸 수가 없었다. 아.. 그냥 입던 바지 입고 나올걸이란 후회가 막심했지만 이미 늦었다.
천천히 걷기에는 너무 양심에 찔려 빨리라도 걷다 보니 5km에 도달했다. 5km 지점에는 급수대가 있었다. 비록 걷지만 마지막으로 목을 축이고 1시간 30분은 족히 지났으므로 목이 너무 말라서 급수대에 도달하자마자 물을 마셨다. 나 홀로 걷기 대회 참가 중이지만 어디서 본건 있어가지고 다 마신 컵은 도로 옆에 던져서 버렸다. 7.5km 지점에는 땀 닦는 용도로 보이는 스펀지 배급대가 있었다. 자원봉사자 분들이 참가자들의 배번호에 적힌 이름들을 보고 ‘000 파이팅!’을 외치셨다. 어떤 분은 나를 포함해 걷는 분들을 향해 ‘걷지 마!!!’를 외치셨다. 저도 안 걷고 싶은데요, 제 몸과 바지가 저를 따라주지 않네요.. 추울 줄 알고 겉옷을 입어서 배번호의 이름이 안 보이는 것이 다행이었다. 이름이 보였으면 너무나 부끄럽게 큰소리로 ‘거북이 걷지 마!!’라고 하셨겠지.
가다 보니 곧 반환점인지 반대쪽 도로에서 많은 분들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1시간 10분 페이스 메이커들을 발견하고 저분들만 따라가면 되겠다고 결심했다. 결과는 뻔하게도 어림없는 소리였다. 뛸 때는 그분들을 약간 앞질러 갔지만 걷는 동안 그분들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리고 곧 1시간 20분 페이스 메이커 분들을 발견했다. 그분들도 곧 점점 앞으로 멀어져 갔다. 1시간 20분 페이스 메이커까지 놓친 나는 이렇게 1시간 30분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낙오되는 것일까? 그래도 아직 내 주위에 비슷한 속도로 앞으로 가고 있는 참가자들이 더 있었다. 그중에는 초등학생 자녀를 데리고 오신 부모님이 계셨다. 아빠가 아이에게 운동장 2바퀴만 더 뛰면 된다고 다독이면서 데리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동생이 나갔던 시 대회에서도 가족끼리 오신 분들이 참 많았다. 우리 가족이 가족 동반 등산을 가는 것처럼 주말에 쉬지 않고 가족들과 이런 좋은 경험을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슬프게도 나는 그 초등학생 아이보다 훨씬 못 뛰었다. 보폭은 내가 더 넓을 텐데 말이다. 그 가족도 이제 내 눈앞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반환점을 돌고 가다 보니 반대쪽에서 버스와 경찰차가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아니 저것이 말로만 듣던 ‘낙오자용 버스’? 모든 참가자가 지나간 도로는 이제 통제가 끝나서 차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쫓아오는 버스를 본 나는 경각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근육에 남아있던 각종 영양소를 다 짜내서 뛰고 싶었지만 이미 내 신체는 걷기의 달콤함에 빠진 뒤였다. 런데이 코치는 일정한 페이스로 뛰라고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지금은 나의 페이스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든 완주를 하느냐 마느냐라는 이번 대회 한정 더 큰 문제가 걸려있어 그런 건 잊은 지 오래였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모두 운동 지식은 박사급이다. 몸이 안 따라 줄 뿐.
엄청나게 헉헉거리는 내 숨소리만 들으며 간신히 계속 앞으로 나아갔지만 길이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구간인 청계천 쪽으로 접어들자 러닝크루 응원단이 ‘500m 남았어요!’라고 외치셨다. 그 ‘500m’ 정도는 뛸 수 있겠지라는 생각이었지만..... 네... 저는 안 되는 사람이에요. 그래도 계속 가다 보니 눈앞에 드디어 FINISH 라인이 보였다. FINISH 라인이고 뭐고 솔직한 심정으로 그냥 걸어서 통과하고 싶었다. 그래도 막판이니 10, 20m를 간신히 뛰어서 두 다리로 FINISH 라인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