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지분은 '김치 통'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한 화요일.
흰머리 소년은 산책을 나가셨는지
집이 텅 비어있습니다.
신문을 펼쳐 들고 잠시 책상에 앉았는데
한 시간쯤 지나니 흰머리 소년이 들어오십니다.
역시, 손에는 검은 봉다리가 들려 있습니다. ㅎㅎ
뭘 또 사 오셨냐고 잔소리를
한 봉다리 안겨드릴까 하다가 참았습니다.
"그건 뭐예요?"
"파 좀 사 왔어. 김치 담그려고.
배추가 한 단 있는데 김치나 담거야겠다."
오잉? 집에 배추가 한 단 있었다고?
잠시 후, 주방이 시끄러워집니다.
도마에 칼 써는 소리,
찬장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
흰머리 소년 끙끙거리는 소리. ㅋㅋㅋ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배경음악 삼아
아들놈은 독서한답시고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아들놈 잔소리 추임새 좀 넣어 드려야 합니다.
"아버지, 제발 주방에 불 좀 켜고 하세요!"
슬쩍 다가가서 주방 불을 켜 드립니다.
"낮에 뭐 하려고 불을 켜냐"
잔소리를 하거나 말거나 배주를 버무리십니다.
전기가 그렇게 아까워서
전기장판을 하루 종일 켜고 있으시다가
자려고 누우면 끄시는 양반이 말입니다. 하하
한 시간쯤 지나니
"저기 찬장에서 김치 통이나 꺼내라,
저 위 찬장에 있을 거다.
너무 높이 있어서 못 꺼내겠다"
그 모습이 참 천진난만하십니다.
"만들다 보니 너무 허연가?"
"고춧가루 좀 더 넣으시면 되죠."
잠시 화장실에 다녀와 보니
흰머리 소년께서 고춧가루를 붓다가
확 쏟으셨습니다. 하하하
쏟아진 고춧가루를 다시 쓸어 담고,
우여곡절 끝에 김치를 완성했습니다.
그렇게 오래 같이 살면서도
저는 김치에 김자도 담글 줄 모릅니다.
한 시간 정도 만에 뚝딱 김치를 만들어내는
흰머리 소년 솜씨에 그저 감탄만 나옵니다.
이 김치에 제 지분은 약 0.001%입니다.
김치통 꺼낸 지분이지요. 하하하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데 김치 맛이 일품입니다.
비록 고춧가루가 여기저기 튀어서
다시 닦아내는 수고가 추가 됐지만
일류 호텔 음식이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오늘 외출해서 또 뭔가 한 봉다리 사오신건,
눈 감아 드리기로 했습니다. ㅋㅋㅋ
고춧가루보다 더 진한 웃음이 피어납니다.
* 에필로그
다음번에는 김치 만드는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해야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