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과 만남
물리치료사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필수 관문 중 하나가 임상 실습이다. 보통 졸업하기 1~2년 전부터 실습을 하기 시작하는데 대부분의 실습 장소는 병원으로 정해진다. 모두에게 병원에 대한 이미지가 다른 만큼 실습지는 무성한 소문에 가려져 있다. ‘어느 선배가 그 병원에 있대.’, ‘그 병원은 앉지도 못하게 한대.’, ‘어떤 병원은 과제만 하루에 기본 한 개씩 이래.’ 무성한 소문 속에서 실습지 선택이라는 전쟁이 시작된다. 학교별로 실습지를 선정하는 방식은 다르다. (병원에서 근무하며 실습 온 학생들에게 실습지 선정 방식을 듣고 놀라고는 했다.) 내가 다닌 학교는 같은 학년 학생끼리 희망 병원을 선정하여 분배했다. 혹시라도 사람이 한 곳에 몰리기라도 하면 가위 바위 보라는 고전적인 방식을 사용했다. 실습지를 결정해야 하는 날엔 원하지 않는 병원에 배정된 학생이 우는 등 다양한 광경이 펼쳐졌다. 나는 다행히도 희망했던 병원에 무난히 들어가 뒤에서 조용히 진풍경을 감상했다.
보통 학생들과는 다르게 개인적으로 생각한 목표가 하나 있었다. 물리치료가 정말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 학문인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내가 하는 학문이 그저 이론뿐이었다면 과감히 그만 둘 의향도 있었다. 치료 효과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굳이 공부할 필요가 없다 생각했던 걸까. 내가 봐도 별난 생각이긴 하다. 그래도 당시의 나에겐 나름 진지한 목표였다.
실습을 나가는 첫날은 정말 떨린다. 마치 군대에 입소하는 훈련병 같은 기분이다. 모두 같은 옷을 입고 다른 학교 학생들과 어색한 만남을 한다. 어색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우리를 향해 오는 치료사 선생님께 유의사항을 듣고는 얼어붙은 채 각 치료실로 흩어진다. 드디어 말로만 들어봤던 치료실에 들어간다. 처음으로 환자와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긴장 반, 두려움 반. 첫날이라는 걸 감지한 선생님께서 긴장을 풀어 주시려 한다. 환자도 이미 많은 실습생을 보아 왔는지 함께 장난을 치신다. 웃기지는 않지만 억지웃음을 지을 뿐이다. 나의 실습 첫날 모습은 이랬다. 지금은 실습생을 받는 입장이 되니까 느낌을 많이 잊어버렸다. 하지만 새롭게 실습 온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나를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오곤 한다.
실습은 기본적으로 옵저베이션(observation)을 기본으로 한다. 단어 그대로 관찰한다는 뜻이다. 선생님께서 치료를 하고 계시면 테이블 앞에 앉아 보면 된다. 종종 치료 보조를 부탁하는 선생님도 계시지만 대부분은 그냥 앉아 있는다. 그냥 앉아서 본다는 것이 쉬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루 8시간을 관찰만 한다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눈 앞에서는 치열한 체험 삶의 현장이 펼쳐지고 있다. 나 홀로 외딴섬에 떠있는 기분이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눈만 끔뻑끔뻑 뜨고 있노라면 치료 중이던 선생님의 눈에 내가 띈다. 질문이 하나씩 날아온다. 방심하고 있다가 날아온 질문에 어안이 벙벙하다. 간단한 신상 정도의 질문이라면 편안하게 이야기 하지만 전공 질문이라도 날아올 때라면 이미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다. 생각보다 별 것 아닌 질문인데 말이다. 대답 못한 질문은 과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몇 개월을 각 치료실을 돌며 이렇게 옵저베이션을 하다 보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법적으로 요하는 필수 실습 기간이 정해져 있다. 각 학교 별로 실습 중요도에 따라 실습 기간을 정한다. 나는 8주 동안 실습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긴 학생들의 경우 6개월을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8주간 쌓여가는 과제만큼이나 환자 들과의 정도 쌓여간다. 2 달이면 환자들의 입 퇴원 기간과 얼추 비슷하다. 내가 실습을 시작할 때 입원하는 환자라면 함께 병원을 떠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유난히 정이 가는 환자들이 생긴다. 한 달이 넘어가면 출근하며 인사하는 환자들이 생겨난다. 실습하는 학생일 뿐인데 묘한 유대감이 생겨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직업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언뜻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런 생각이 들 무렵이었을까. 내 실습 목표를 알기라도 하신 듯 한 선생님께서 제안을 해 주셨다.
“진짜 SOAP 노트를 써 볼래?”
SOAP note. Subjective information(주관적 정보), Objective information(객관적 정보), Assessment(평가), Plan(계획)의 약자로, 환자의 경과기록을 적는 가장 대표적인 양식이다. 각 학교나 병원에서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대부분은 약식으로 양식만 채워 진행하게 된다. 실제로 실습생에게 평가나 치료를 맡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습 때 내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눈 여겨 보신 선생님 한 분께서 제대로 된 SOAP 노트를 써볼 것을 제안해 주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잠시라도 머뭇거리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면 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하셨다. 나는 그만큼 망설임이 없었나 보다.
“네, 하겠습니다.”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있던 내게 이만한 기회는 없었다. 환자 분을 설정해 줄 테니 인터뷰를 해서 필요한 평가를 찾아오라 하셨다. 나의 과제를 위해 선생님께서는 환자 분께 찾아가 직접 양해를 구하셨다. 치료사가 된 지금, 나라면 생각도 못할 일인데. 선생님께선 고맙게도 이런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정해주신 분은 마침 그동안 정이 든 환자 중 한 분 이셨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환자 분을 찾아가 인터뷰를 했다. 집에 가서는 각종 평가를 찾아보았다. 하루의 고된 일과는 잊은 채 열심히 몰두했다. 찾은 평가를 정리하고 선생님께 드렸다. 한참을 읽어 보시던 선생님께서는 몇 가지 설명을 해주시고는 환자의 치료 시간에 선생님을 찾아오라 하셨다. 그렇게 다가온 치료시간. 선생님께서는 직접 내가 찾아온 평가를 보여주시고 이를 토대로 치료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나의 실습 목표가 눈앞에 펼쳐진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 내가 고민한 평가로 문제점을 찾고 그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 논리적이고 효과적이었다. 땀을 흘리며 치료한 결과가 눈에 보였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치료사가 된 지금. 저 과제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몸으로 깨닫곤 한다. 일 년에도 수 백명의 실습생이 온다. 굳이 실습생에게 이런 기회를 줄 의무도 없다. 내 일만 해도 바쁘니까. 혹시라도 이런 과제를 내준다 해도 학생이 찾아온 평가에 맞춰 치료를 보여준다는 것은 어지간한 치료 실력과 지식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나는 엄청난 배려를 받은 것이다. 이 배려 덕분에 나는 치료사라는 이름을 달고 임상에 나올 수 있었다.
내게 실습은 마치 첫사랑 같았다. 두렵고 떨리지만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해주는 황홀한 경험. 이 설레는 기억이 나를 멈추지 않게 해주는 불을 지펴주었다. 첫사랑이 그렇듯 모두가 다르게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간은 지금도 또 한 명의 치료사를 만들어주고 있다.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