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말은 참으로 오묘하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처럼 글자 하나 차이로 의미가 바뀐다. 심지어 글자의 변동 없이 말 끝의 소리 높이만 달라져도 문맥의 의미가 반전되어 버린다. 말이란 당연하게 사용 되어진다고 느껴왔다. 하지만 언어의 세계는 자세히 볼수록 복잡 미묘하다.
말은 무게가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밀도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하루에도 수만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하지만 실제로 입을 거쳐 나오는 말은 극히 일부. 같은 말을 하더라도 무게가 실리지 않는다면 말은 방방 뜬다. 설사 가벼운 말이라도 오밀조밀 모여 무게를 갖는다면 밀도가 높아지며 천천히 가라앉는다.
하루에도 내뱉는 수백, 수천 가지의 말. 나는 지금 어떤 말을 입에 담고 있을까.
언어는 크게 듣기와 말하기를 포함한다. 듣기란 소리의 해석을, 말하기는 생각을 언어로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발음과 의미를 해석하는 두 가지의 시스템이 함께 작동하게 된다.
말은 생각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한다. 하지만 뒤집어서 보면 생각을 구성하는 이미지도 대부분 언어로 되어 있다. 언어를 포함하지 않는 상상이나 공상, 꿈은 기억에 오래 남지 않으나 언어로 구성된 생각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만큼 언어는 개인의 한 세계를 만들어 준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삶의 일부인 언어. 이런 언어가 사라지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뇌졸중 환자는 높은 확률로 언어 장애가 발생한다. 특히 좌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보니 뇌의 왼쪽을 다치신 분들이라면 더 큰 언어 장애를 남기게 된다. 언어를 담당하는 영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브로카 영역, 다른 하나는 베르니케 영역이라 불린다. 둘을 쉽게 이야기하면 말하는 뇌와 말을 이해하는 뇌라고 생각하면 된다. 둘은 서로 간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하나의 영역만 다쳐도 양상만 다를 뿐 언어를 사용하기 어려워진다.
언어가 사라진 삶은 쉽지 않다. 간단한 표현조차 이해하기 어려워 지고 비록 말을 이해 할지라도 이를 표현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힘겹게 한 마디 꺼내 보려 해도 단어 하나, 음절 하나 꺼내기 쉽지 않다.
그런데 말을 잃은 분들을 보면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반복해서 표현하는 한 두 가지의 단어가 정해져 있다는 점.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는 의성어가, 또 다른 누군가는 감사의 언어가, 그리고 어떤 이에게선 욕설의 언어가 남는다.
예전에 치료해드리던 분 중 꼬꼬 할아버지라 불리셨던 분이 계신다. ‘꼬’라는 단어밖에 말하지 못하는 바람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모든 표현은 ‘꼬꼬’에 감정을 담아서 전달되었다. 더욱 인상 깊었던 점은 다급해지거나 억울한 일이 생기면 욕을 하셨다. 비록 표현할 수 있는 욕도 한 가지였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어김없이 욕을 입에 담으셨다.
기존 언어를 연구하는 많은 방향은 개인과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언어 자체로서의 연구가 주를 이룬 것이다. 하지만 언어를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기 시작한 이후로 언어에 대한 시각이 뒤바뀌게 된다. 인간 안에서의 논의 뿐 아니라 다른 동물들과 비교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밝혀진 것이 바로 언어는 운동이라는 점이다.
언어가 운동이라는 사실은 예측과 수정이라는 일련의 절차를 거치게 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습관’을 만들게 된다. 즉 우리가 하는 말은 이미 만들어진 습관의 범위에서 예측과 수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습관의 무서움은 의식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점. 내가 입에 담고 있는 가벼운 말 대부분은 인지하지도 못한 채 흘러나오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말을 잃은 사람에게 남는 하나의 단어가 그 사람이 가장 많이 혹은 가장 무게 있게 입에 담아 새겨진 말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요즘 무슨 말을 주로 하고 있을까. 기쁨일까, 감사일까 아니면 분주함일까, 분노일까. 습관적으로 나오는 말이 의식 속, 하나의 세계가 되어 입에 담긴다.
내가 지금 입에 담고 있는 세계, 어쩌면 언젠가 나에게 남을 한마디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