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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무환

물리치료사의 마음 이야기(비와 병원)

 나는 비가 싫었다. 아니 아직도 비가 싫다. 딱히 비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비가 싫었다. 우중충한 날씨, 높아지는 습도, 가라앉는 분위기. 모든 조건이 나와는 맞지 않는다. 운치 있고 좋다는 설득(?)을 하려는 사람들도 왕왕 있었지만 그다지 나에게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혹여라도 비 예보가 있는 날이면 얼굴부터 찡그리곤 했다.     


 하루는 비가 오는 날이었다. 실습생이었던 당시의 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심지어 비가 오는 덕분에 어김없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긴장한 내 모습 보셨는지 선생님 한 분께서 가벼운 질문을 하나 던지셨다.

“유비무환이 무슨 뜻인 줄 알아?”

 갑작스러운 질문에 전공 질문일까 걱정했는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원래 알고 있는 뜻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한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비가 오면 환자가 없다.”     


 10초의 정적을 깨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유머였는데 나의 반응이 늦었다. 아차! 나의 실수로 대화는 끝이 나버렸다.     


 몇 년 뒤 나는 임상에 나왔다. 매일이 숨가쁜 하루였다. 일찍 나와 늦게 들어 가는게 일상이었고 나의 하루는 병원에서의 생활이 대부분이었다. 날씨가 어떤지, 계절이 어떤지 피부로 느끼기 어려운 때였다. 이따금 계절이 궁금할 때면 창문을 보며 시간을 느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하리만큼 한가했다. 치료 시간마다 환자가 도착하지 못했다는 연락을 받았고 갑자기 찾아온 여유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여유로움이 계속되니 이상함을 느낄 찰나 창문을 보니 비가 왔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비 예보가 없었는데.’ 비로 인한 우중충함과 한가로운 여유가 겹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생각이 났다. ‘비가 오면 환자가 없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나름의 이유가 있는 말이었다. 입원 환자는 비가 오면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외래 환자는 비 때문에 방문하기 힘들어서 치료 시간에 오지 못했다. 오지 못한 이유가 좋지 못하다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런데 환자가 도착하지 못한 빈 시간은 남는 시간이 되어버린다. 물론 그동안 놀지는 못하더라도 나름의 여유가 생긴다. 밀린 행정업무를 하면서 커피 한 잔을 마신다. 한껏 찡그린 표정에 힘이 풀린다.     

 

 빗소리가 창문을 울린다. 빈 침대 하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 덩그러니 놓여있다. 비 때문에 치료를 오지 못한다는 소식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묘한 감정이 비와 함께 흘러 들어오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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